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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Mar 14. 2024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자살을 보는 다른 시각

 어떤 선택이든 이유가 있다. 이유 없다는 말도 속을 들여다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완벽하게 솔직한 사람은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로봇 타스(TARS) 솔직함의 정도를 조절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강도를 조절하면서 산다.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진솔한 태도를 갖고 있을까? 부고를 듣고 가끔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생각한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태어난 이상 반드시 맞이하는 결말이라는 사실을. 속도의 차이가 있을  죽음은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찾아온다. 늦추거나 앞당기는 것은 운명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선택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를 앞당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자살은 능동적인 결정이다.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 뿐 선택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단어를 자살을 대체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남겨진 주변 사람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떠난 사람은 고심을 거듭해서 내린 선택이다. 다만 자살이 대안이나 해결책은 될 수는 없다. 물론 자살하는 사람이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걱정해 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타박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떠난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남은 사람들은 추측하고 추억할 뿐이다. 그저 뒤늦게 밝혀진 정황을 근거로 가까스로 현실을 납득하는 것이 전부다. 가까운 사람들은 죽음의 원인을 추적하면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딱 한 번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본 사이였지만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잘생긴 데다 붙임성 있고 친화력도 좋은 타입이라 분위기를 띄우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때문인지 죽음이라는 단어가 와닿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들은 부고는 꼭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환한 미소 뒤로 그는 어떤 고통을 숨기고 있었을까?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그의 선택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풀 수 없는 블랙박스를 끌어안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딱 한 번 본 사이였지만 충격은 작지 않았다. 정말 가까운 사람들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대다수는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냥 사는 사람도 있고 죽음 앞에서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도 있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버티다 보니 멀쩡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죽음의 형태와 죽는 방법 그리고 장소와 시간 같은 배경까지 생각한다. 주기적으로 구체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다 보면 결국 본인의 죽음을 시각화하게 된다. 선명하게 각인되고 나면 혼자서 떨쳐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의 덫에 사로잡히고 나면 벗어날 수 없다.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티를 내지 않으면 알아차릴 방법이 없다. 뒤늦게나마 누군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심각한 상태다.


 겉으로 봐서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알아차리고 말을 건넨다고 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어떤 면에서는 불안한 정신과 피폐한 내면을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계하거나 부정하면서 마음을 꽁꽁 숨기는 경우가 흔하다. 두꺼운 가면을 쓰고 안전한 이미지 속에 어둠을 가두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개의 세상을 사는 것이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가면을 쓰고 사는 낮의 삶. 혼자가 되면 가면을 벗고 차가운 어둠 속에 물드는 밤의 삶. 죽음은 밤의 그늘 속에 숨어서 천천히 사람을 집어삼킨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세상에서 점점 멀어진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연기한다. 가족도 친구도 속내를 알 수 없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생했던 지인은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승승장구했다. 일과 인간관계 모두 정말 완벽하게 성공한 삶이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받은 연락은 그 화려한 성공과 대비되는 소식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구체적인 형태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미래도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은 공허한 내면을 가려주는 훌륭한 장막이었다. 죽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에 나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엇이 힘들게 하는지 삶을 버리고 싶은 동기가 된 것인지 묻지 않았다. 성공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변한 것이 없었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렸다. 열심히 살수록 반대로 내면의 우울한 감정과 허무감은 더 깊어졌던 모양이다.

 

 전문의의 진료를 꾸준히 받고 있는 그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피곤함이 배어있는 목소리였다. 죽음과 고군분투하는 삶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죽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매일 충돌한다. 내면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진을 아무도 모르게 견디면서 사는 삶. 여러모로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받아들이거나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다.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일화는 단편적인 부분으로만 그려진다. 우울이나 정신문제라는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죽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색일까. 죽음을 안고 사는 이의 내면은 어떤 계절일까. 들여다보고 징후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선택을 바꿀 수 있을까?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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