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법
문명은 공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공감이 한데 모이면 공감대가 된다. 공감대는 강력한 사회적 언어다. 사람과 사회 사이에 신뢰를 만들고 법과 정치 같은 사회체계를 유지하고 운영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대의나 변혁을 이끄는 명분도 공감에서 나온다. 변화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서 시작됐다. 민심을 얻는 자는 늘 세상을 바꿨다. 역사는 인간이 만든 거대한 공감대의 기록이다. 사회화를 통해 인간은 같은 생각과 감정이 갖는 영향력을 깨닫게 된다. 공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새로운 욕구가 내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든다.
사람들의 속내를 알고 싶고 마음을 얻고 싶은 공감의 욕망은 중독성이 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정도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감을 통해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욕심은 한계가 없어서 위험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갈구하게 된다. 이미 많은 한국인들이 공감중독 상태에 빠져있다. 주변 지인들에게 수시로 공감을 요구하고 동조해 줄 것을 강요한다. 물론 본인은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 일상이 된 습관을 문제로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각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외면한다. 남들도 나랑 똑같다고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한국은 공감과잉사회다. 관심과 애정에 목을 매고 공감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이제는 강요를 넘어서 강제로 주입하는 단계에 왔다. 거부하는 반응을 드러내면 비난과 비아냥이 돌아온다. 공감의 본질인 관용과 존중은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한국사회에서 공감은 편가르고 사람을 나누는 용도로 변질되어 버렸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면서 낙인을 찍어버리고 사고방식을 비정상으로 치부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공감능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고 몰아세운다. 공감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힘을 부정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갈등과 혐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공감은 사람을 연결하고 집단을 결속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만큼 악용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뒤틀린 공감대는 상대방을 배척하고 다양성을 저해하는 고정관념이 된다. 동시에 공감을 통해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면서 중독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 공감은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다다익선은 적어도 감정과 관련해서는 정답이 아니다.
과도한 공감에 대한 집착은 결국 중독으로 이어진다.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심하면 독이 된다. 관계는 늘 적당한 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공감은 의존과 종속이라는 비정상적인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비롯된 부채감과 의무감은 정신건강을 해치고 일상까지 파괴한다. 타인의 삶을 떠 앉는 것은 정말 위험한 행동이다. 남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를 제외하면 남은 결국 남이다. 하나뿐인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라고 할지라도 생각과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공감도 한계가 있다. 만능이 아니다.
공감을 받지 못하면 우울감과 탈력감에 빠지는 사람들이 SNS 속에 널려있다. 좋아요 숫자는 관심과 애정이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르는 하트는 감정이나 진심이 텅 비어있다. 애정결핍으로 결함을 포장하고 낮은 자존감으로 현실을 외면하다 보면 공감에 집착하게 된다. 현실은 모니터 밖에 있다. 핸드폰 화면 너머로 시선을 돌려야 진실이 보인다. 관심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에서 아무리 많은 공감을 받아도 현실은 별개의 세계다. 진심이 닿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진정한 공감은 온라인이 아니라 현실세계에만 존재한다.
머지않아 메타버스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현실이 갖는 의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감정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고 진심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진짜 소통은 오로지 온기와 진심을 나눌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공감은 양에 집착하지 말고 깊이를 가늠해야 한다. ‘얼마나 많이 얻는가’보다 ‘얼마나 진실된 감정을 나누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