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Apr 09. 2024

무기력의 늪

우울과 불안보다 무서운 것은 무력감이다

 늪에 빠진 동물들은 처음에는 맹렬하게 발버둥 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용해진다. 탈출 불가능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음이라는 운명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다 늪 속으로 사라진다. 천천히 생명을 빼앗아가는 늪과 무기력은 많이 닮았다. 무기력은 인간에게서 생기를 빼앗아간다.


 심리적인 무력감은 삶의 원동력을 사라지게 만든다. 우울감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무력감은 사람을 살아있는 시체로 바꿔버린다.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해지면 관계나 책임 그리고 역할에 무심해진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신경해진다.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으므로 애정을 주고받거나 감정을 나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언뜻 보면 평온하고 초연해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차갑고 황폐한 한겨울의 들판처럼 모든 것들이 죽어있는 상태다. 온도는 달라도 분노나 사랑 같은 역동적인 감정은 심리상태를 드러내지만 무기력한 마음은 표정이 없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면 사람은 껍데기만 남는다. 가까운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울과 불안 같은 심리적인 고통이 커질수록 지독한 무기력증이 찾아올 가능성도 늘어난다. 무력감은 우울과 불안을 비롯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종착역이다.


 차가운 파랑과 이글거리는 빨강 그리고 뿌연 회색과 밝은 노랑을 섞으면 검은색이 된다. 여러 가지 색깔을 한데 뭉치다 보면 마지막에는 늘 어두운 색으로 변한다. 학창 시절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다 붓을 헹구면 시꺼먼 구정물이 되는 것처럼 마음도 변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깊은 어둠이 무력감의 본질이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 속에 살아있는 것은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빛을 따라 바뀌는 바다의 색깔처럼 사람의 마음도 달라진다.


 어둠을 받아들이면 영혼 깊은 곳까지 전부 검게 물들어버린다. 마음을 다치면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 남도 모르고 본인도 모른다.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되면 잠시 쉬거나 사람들을 만난다. 한 번씩 이상징후를 느끼지만 그냥 넘어간다. 방치한 채 바쁘게 살다 보면 상처는 점점 더 깊어진다. 우울감과 불안은 상처를 덧나게 만든다. 이 시기에 크게 좌절하거나 실망하는 사건이 생기면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진다.


 위기감을 느끼고 병원을 찾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전문의를 찾아가지 않는다. 내 마음은 내가 잘 안다는 생각으로 조금 더 버텨보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언제나 인간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몸과 마음이 보내는 구조신호를 바로 인지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상처는 깊은 곳까지 파고들면서 커다란 구덩이를 만든다.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은 결국 지반을 무너뜨린다. 심리적인 기반이 무너지면서 정신은 피폐해진다.


 누가 봐도 이제 마음이 아프다는 티가 난다. 점점 감정이 무뎌진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것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일도 가족도 친구도 인생도 별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삶은 원래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의미를 부여할 때 삶은 가치를 얻는다. 인간은 의지의 동물이다. 의미 있는 것들이 삶을 구성하면서 살아가려는 의지도 단단해진다.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은 건물의 기둥이 통째로 사라진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다.


 내면에서 회복력을 상실하게 되면 외부에서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주변 사람들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써보지만 당사자는 반응이 없다. 천천히 꺼져가는 불빛처럼 점점 더 차갑고 어두워진다. 우울과 불안보다 무서운 것이 무력감이다. 심리적인 이상징후를 느끼면 즉시 전문의를 찾아가야만 한다. 특히 무기력한 감정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혼자서 해결하려는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한다.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무력감이다. 인생의 즐거움이 모두 검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다. 텅 빈 내면의 차가운 기운은 공허한 눈빛으로 뿜어져 나온다. 껍데기만 남은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안타깝다.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치열하게 경쟁하고 모든 것을 비교하고 서로 순위를 매기고 눈치 보고 발버둥 치면서 산다.


 한국 사회는 휴식시간이 없다. 한 번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면 충전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리적인 면역력이 떨어지기 좋은 환경이다. 커다란 실망과 깊은 좌절로 인해 내면의 심지가 꺾이게 되면 사람은 망가진다. 가슴까지 늪에 잠기면 늦는다. 심장이 차가워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혼자서 감당하지 말고 줄을 잡아야 한다.

이전 10화 공감은 양날의 검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