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Apr 23. 2024

어둠 속의 삼각주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면 덮어놓을 수밖에 없다

 몸상태는 체질차이를 근거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관절이나 기관지가 약한 체질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넘어간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표현하는 쪽도 드러내기 힘들고 듣는 쪽 역시 가늠하기 쉽지 않다. 친밀감이 형성된 가까운 사이라도 내밀한 감정을 보여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솔직함 대신에 매일 착용하는 이미지라는 가면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기분은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한 번씩 속을 들여다보면 전하지 못한 감정과 털어내지 못한 부정적인 마음들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분리수거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감정들은 쌓이다 보면 산등성이처럼 높아진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어지러운 방을 넋을 놓고 바라볼 때의 막막함.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상황을 보고 문을 닫아버린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이미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해결할 능력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조각난 감정이 쌓인 쓰레기장을 잊고 산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갑자기 느껴지는 불안이나 알 수 없는 우울함은 모두 그곳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밀린 방학숙제를 하루 이틀 만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기와 탐구생활을 채우려면 시간과 체력이 필요하지만 금세 한계에 직면한다. 반나절 내내 쉬지 않고 써봐야 진전은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잔뜩 밀린 일거리다. 고민이든 일이든 한 번 밀려서 쌓이기 시작하면 사이즈가 달라진다. 밀린 방학숙제는 꾸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 준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실수는 반복을 통해 완성된다. 일상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은 타오르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사그라든다.


 고운 모래처럼 감정들이 퇴적되다 보면 가슴 깊은 곳에 커다란 삼각주가 만들어진다. 감정의 쓰레기더미가 쌓여서 만들어낸 산과 삼각주는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삶의 즐거움을 잃어갈 때 그리고 인간관계와 일상에 지쳐있을 때 어두운 삼각주를 한 번씩 내려다본다. 가만히 바라보면 언제 이렇게 음울하고 차가운 감정들이 가득 차있었는지 놀라게 된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어지러운 방은 이제 새까만 곰팡이와 끈적한 어둠으로 뒤덮여있다.


 걷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방법을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른다. 주변 사람들이 이런 내면을 알아차릴까 봐 두렵다. 급하게 문을 닫고 걸어 잠근다.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면 역시 덮어놓을 수밖에 없다.삼각주 위로 무성하게 자란 감정들은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박혀있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불안과 줄기마다 근심을 달고 있는 걱정.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열등감과 이끼처럼 과거를 덮고 있는 후회까지.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야 할 자존감은 빛을 잃었고 무기력은 소나기처럼 찾아와서 우울함을 범람하게 만들었다. 돌풍처럼 갑작스럽게 불어닥치는 분노는 평정심을 앗아간다. 땅에 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아집은 허수아비처럼 그 풍경 속에서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면 속의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힘이 빠졌다. 일그러진 내면을 우리는 누구에게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양쪽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날 것 그 자체인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매번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이미지는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다. 의심을 차단해 주는 단단한 갑옷이다. 모두들 비밀을 안고 산다. 그리고 상처도 함께 품고 살아간다. 사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말썽을 부린다.


 아무도 모르게 갑옷 아래 꽁꽁 숨겨놓은 것들이 요동친다. 나이가 들어도 경험이 늘어도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철이 들면  나아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노력이  필요한  같다. 광활하게 펼쳐진 어두운 퇴적층 위에 홀로 서있을 때마다 공허한 기분이 든다. 아마 다들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모두가 외롭고 여전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전 12화 물음표가 뜨는 인간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