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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Oct 20. 2024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서민이란 무엇인가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 더 힘들어진다.” 엄마의 오래된 입버릇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벌써 20년 넘게 이어지는 레퍼토리다. 예전에는 잔소리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삶을 관통하는 한마디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민의 삶은 우하락곡선을 그린다. 현상유지는 힘들고 우상향 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낡은 연립주택 단지를 벗어나 브랜드 아파트에 입성하는 집이 얼마나 될까? 공급량이 실거주를 일찌감치 추월했지만 여전히 서민들에게 신축아파트는 꿈같은 단어다. 살아가는 일은 계속해서 더 버거워진다. 물가는 오르고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늘어나는 것은 나이와 걱정뿐이다.


 서민은 은퇴가 없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여있으므로 쉬지 않고 일한다.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다 노인이 된다. 은퇴연령을 훨씬 넘긴 나이가 돼서도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백세시대가 불러온 노년의 삶은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관광과 여가를 즐기는 노인과 허드렛일을 하면서 병원비와 약값을 버는 노인의 격차는 너무나 크다. 몸이 쉴 수 없는데 마음이 과연 편안할 수 있을까? 평온함을 느낄 새도 없이 걱정은 일상을 집어삼킨다. 여유롭게 발 뻗고 누려본 적이 없다 보니 걱정이 만든 틀 안에 쭉 갇혀 지내게 된다.


 삶의 결정권이 없으므로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다. 불안한 고용환경, 정책에 즉각적으로 영향받는 주거환경, 물가와 경기에 타격받는 생활환경까지. 살아가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생존난이도는 물가처럼 매년 급상승한다. 여름 지나면 곧바로 겨울이다. 한숨 돌릴 여유가 없다. 최고의 안티에이징은 여유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여유가 늘수록 걱정이 줄어든다. 하지만 걱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빨리 늙는다. 삶의 생기를 빼앗아가면서 쇠락을 맞이하게 된다. 서민은 평생 걱정에 시달리다 나이 들어버린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만큼 스트레스나 질병의 위협에 훨씬 취약하다. 사기나 사이비 범죄의 주요 피해자는 주로 서민이다. 썩은 동아줄을 잡는 비극이 수시로 발생한다.


 서민이라는 말보다 서민의 삶을 잘 대변하는 단어는 없다. 쉽게 쓰이는 표현이지만 품고 있는 속뜻은 가볍지 않다. 국민이나 시민 같은 표현보다 서민은 훨씬 초라한 인상을 준다. 계층이 계급에 가깝게 고착화되면서 서민은 사실상 이등시민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조선시대로 비유하자면 서민은 백성이 아니라 민초에 가깝다. 백성은 벼슬이 없는 평민을 의미하지만 민초는 잡초처럼 질기다는 뜻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문학적인 수사는 반어법에 불과하다. 평생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여 사는 계층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계급 내에서도 다극화가 발생했다. 상류층에서는 1%를 초월한 압도적인 0.01%가 위용을 드러냈고 서민층 역시 거주지역이나 주거형태를 두고 상하관계가 형성됐다. 서울에 사는 서민은 지방에 사는 서민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는 인식이 생겼다.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면 같은 서민이라도 중산층으로 취급받는다. 등급을 나누고 서열을 정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한국인의 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던 문화는 자취를 감췄다. 정서적인 빈곤이나 사회적인 고립에 시달리는 서민들은 점점 더 늘어나는 중이다.


 인류의 역사는 반복이다. 모두 잘 살았던 시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풍족하게 살면서 경제사회적 격차 없이 생활한 나라도 없다. 빈부격차는 인간 문명 외부의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무리의 지배자가 모든 자원과 선택권을 갖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본이나 권력 역시 대동소이하다. 현실을 원망하고 부자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소수다. 대다수의 서민은 성장과정에서 현실을 빠르게 자각하고 열심히 산다. 아이들은 눈치부터 늘고 자라서 내 집마련의 꿈을 품고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 된다. 그런 서민들이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팍팍한 서민경제는 자본주의의 문제나 한계가 아니라 문명의 디폴트 값이다. 체제나 사상의 종류와 무관하게 빈곤과 양극화는 언제나 존재했다. 역사적인 변곡점마다 여러 변수가 등장했지만 고정된 상수는 변하지 않았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혁명에 가까운 이변은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를 문제의 원흉으로 치부하거나 서민들의 역량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차이와 격차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습성이다. 극심한 격차로 인한 차별을 줄이는 노력이 최선이다. 서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선진국이 되고 강대국의 지위를 획득해도 대다수의 서민은 그대로 서민이다.


 국민소득이 늘고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서민의 삶은 더 피폐해진다. 공중보건이나 사회복지는 개선되지만 소득에 따른 삶의 형태가 극단적으로 나뉘게 된다. 상대적인 빈곤이 초래하는 심리적인 빈곤은 서민층을 괴롭힌다. 90년대를 돌이켜보면 아이들 간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 단독주택에 사는 백화점 사장 아들과 차상위계층의 아들이 같은 반 친구로 지냈다. 다들 학교가 끝나면 태권도나 피아노학원을 다녀와서 학습지를 풀었다. 남들처럼 못살아도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IMF가 끝나고 아이들 사이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파트와 빌라촌으로 거주지가 갈리고 사교육의 수준이 달라졌다. 먹고 마시는 것부터 걸치고 누리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등급이 생겼다.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서민층이라는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붙어 다녔다. 나이키 덩크를 신는 아이들과 니코보코나 르까프를 신는 아이들이 사는 동네는 달랐다. 20년이 흘렀지만 격차는 그때보다 더 크게 벌어졌다. 초등학생인 친구 조카는 아이폰을 사달라고 떼를 썼다고 했다. 친구는 100만 원이 넘는 핸드폰이 필요한 이유를 물어봤다. 그러자 아이폰을 쓰는 같은 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엄마의 오래된 입버릇처럼 살아가는 일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고 있다. 불안과 긴장이 요동치는 시기의 생활은 더 팍팍해진다. 삶은 늘 겨울이다. 서민들은 호황이 없다. 밥상물가나 가계부는 항상 불경기다. 로또라도 맞지 않는 이상 계급의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지만 결국 살다 보면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긴다. 고군분투하면서 다들 각자의 전쟁을 치른다. 화려한 욕망을 따라가는 사람도 있고 작은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삶은 한 번이다. 아무리 잘살아도 뭘 하든 아쉬움이 남는다. 힘들어도 삶은 삶이다.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들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그래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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