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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코리아엑소더스

한국 기업들이 나스닥을 노리는 진짜 이유

by 김태민

코리아디스카운트는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같은 주요 산업은 성장동력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년 가을 국내 증시에 코리아밸류업지수를 기반으로 하는 5000억 원 규모의 ETF와 ETN이 상장했다. 저평가된 한국 기업들의 가치를 재평가받으려는 본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세계 자본시장의 돈은 전부 미국으로 쏠렸다. 매그니피센트 7로 불리는 미국 빅테크는 사실상 AI 분야에서 천하통일을 달성했다. 한국 IT업계는 국제무대를 향해 이제 제대로 된 명함을 내밀기 힘들어졌다. 헤게모니와 패러다임이 동시에 바뀌는 대전환의 국면에서 대한민국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만든 AI양강구도에서 한국은 설 자리가 없다.


범용인공지능이나 AI에이전트 같은 목표는 포기하고 소규모 목적에 특화된 AI개발로 방향성을 재설정해야 할 때다. 강점으로 평가받았던 첨단제조업이 중국의 침공을 받으면서 휘청이는 중이다. 미래성장동력으로 내세웠던 AI나 반도체 분야는 중국과 경쟁구도에 놓였다. 지난 몇 년간 국가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국내 기업들은 규모와 분야를 막론하고 기술투자를 줄이고 부동산투자에 열을 올렸다. 혁신과 특허가 부족한 스타트업계는 자금이 씨가 마르면서 한파가 불어닥쳤다. 결국 무더기 폐업이 줄을 이었다. 대기업은 투자를 줄이고 중견기업은 원가절감에 혈안이 됐다. 경영효율화와 체질개선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부는 중이다.


기업계는 비상경영을 통한 위기극복을 선언했지만 앞날은 불투명하다. 기술에 투자하고 인재를 확보하면서 나온 결과물로 수출성과를 내는 선순환 구조는 깨졌다. 인구감소로 인한 내수악화와 글로벌 시장경쟁력 하락으로 수출에도 먹구름이 꼈다. 트럼프 2기의 관세문제도 진퇴양난이지만 애초에 내우외환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제 한국식 성장전략은 소용없다. 기업들은 코리아엑소더스를 택하고 있다. 해외설비투자뿐만 아니라 코스피를 떠나 나스닥을 노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니콘 기업인 토스는 몇 년간 나스닥 상장을 추친한다는 보도를 흘렸다. 작년 초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삼성증권을 공동주관사로 삼아 국내 증시 데뷔를 준비했다.


그러다 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근본적인 목적은 이익이다. 나스닥은 미국이다. 돈이 몰리는 글로벌 시장에 입성하면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상장 증거금 규모도 큰 데다 테마라도 붙으면 기업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코로나 시기였지만 시총 100조를 훌쩍 넘겼던 쿠팡의 전례가 있다.


미국시장은 코리아디스카운트를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대안이다. 당장 네이버웹툰이 분사를 통해 WBTN의 티커를 달고 나스닥에 데뷔했다. 쪼개기 상장이라는 비판을 들었지만 네이버는 공모로 약 4천 억 원을 조달할 수 있었다. 나스닥은 돈이 된다. ‘택갈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기업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다. 성장의 늪이 된 국내증시를 기피하는 성향은 전보다 더 뚜렷해졌다.


컬리, SSG, 큐텐 모두 한 때 나스닥 상장을 정조준했던 기업들이다. 경영문제와 실적악화로 전부 미끄러졌지만 미국 증시를 대하는 기업들의 시각을 알 수 있다. 국내 스타트업들이 해외 VC나 사모펀드의 투자를 선호하는 이유도 미국증시에 입성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토스 역시 알토스벤처스나 굿워터캐피탈의 투자를 통해서 몸값을 불렸다.


토스가 내세운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겠다는 주장은 몸값을 더 늘려서 수익을 크게 가져가겠다는 의미다. 유니콘이나 스타트업들은 투자에 참여한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늘리는데 역량을 집중한다. 고객은 매출지표와 실적을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IPO이후 주식을 매수하는 일반주주들에게 기업은 특별한 책임감을 갖지 않는다.


스타트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IT기업은 고객이 아니라 자금을 대준 전주인 VC를 비롯한 자본가에게 충성한다. 씁쓸한 현실이지만 사실이다. 내수시장에서 플랫폼 장사로 수익을 내는 스타트업이나 유니콘 기업들은 자금줄을 쥔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복종한다. 이용자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사회적인 비난을 받아도 귀를 닫고 실적만 본다.


상장이라는 최종목적지만 보고 질주하는 단거리 스프린터다. 멀리 보고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 증시에서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는 주장은 엄밀히 말하면 궤변이다. 나스닥을 운운하는 한국 기업들의 매출은 대부분 내수시장에서 나온다. 독보적인 원천기술이나 글로벌 수준의 혁신적인 역량은 없다.

나스닥에 상장한 쿠팡을 이커머스 분야의 거두인 아마존과 알리바바와 비교할 수 있을까? 클라우드와 인공지능 로봇에 투자한다고 하지만 미국과 중국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다. 핀테크와 클라우드 분야에서 두 기업은 독보적인 캐시카우를 보유하고 있다. 카카오페이와 비슷한 수준의 토스가 미국 핀테크 기업들보다 나은 점은 무엇일까?


실력이나 실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만한 경쟁력은 부족하다. 그래서 해외 상장주관사와 투자자들의 이름값에 요행에 기대는 면이 강하다. 한국 IT기업들이 나스닥에 도전하는 것은 국내 IT 업계의 실력이 없다는 반증이다. 역량만 출중하다면 국내에 상장해도 얼마든지 해외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다. 한국 시장에도 블랙록이나 뱅가드 같은 초일류 자산운용사들이 투자한 기업들이 존재한다.


세계 시장을 향한 도전을 입에 담지만 한국 기업들의 행보를 본다면 발언의 신뢰성은 매우 낮다. 미국 증시에 입성해서 기업가치를 쉽게 부풀리려는 것뿐이다. 투자유치를 위한 가시적인 실적에 집착하고 단기적인 수익화를 목적으로 상장을 노린다. 기업의 장기적인 행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한국 시장에 만연한 한탕주의의 영향이다.


가치 있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육성하려는 노력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웹툰엔터테인먼트를 상장시킨 네이버는 네이버페이마저 분할상장할 계획이었다. 반발이 강해지자 말을 바꿨지만 모를 일이다. 국내 기업들은 돈이 된다 싶으면 분리해서 수익화를 시도한다. SK와 카카오의 분할상장 그리고 엘지에너지솔루션의 사례는 지금 생각해도 낯 뜨겁다.


스타트업과 유니콘은 엑시트에 혈안이 되어있고 대기업은 수익을 목적으로 회사를 쪼갠다. 법인이나 계열을 분리하고 글로벌 네임밸류를 가진 금융기업을 구원투수로 불러들인다. R&D나 M&A는 등한시하고 회계만 건드려서 실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발표한다. 성공하면 상장 실패해도 호재로 포장해서 돈을 번다. 주식시장과 기업문화 모두 낙제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진정한 위기는 분위기에서 드러난다. 시장에 팽배한 경향은 숨길 거나 감출 수 없다. 대외경쟁력이 없어서 내수시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기업들이 나스닥 상장을 운운한다. 배는 가라앉고 있는데 잔을 들고 샴페인을 나눠 마실 준비를 하는 중이다. 정작 나스닥을 입에 담은 기업들은 성공하면 실적하락 실패하면 운영위기에 빠졌다.


기업은 소비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값을 올려줄 투자자만 찾는다. 이용자들이 등을 돌릴 때까지 수수료를 뽑아먹는 것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는다. 실력이 없어서 실적을 포장하고 단기적인 수익화를 위해서 장기적인 발전계획은 포기했다. 코리아디스카운트는 한국 기업문화가 만든 재앙이다. 책임경영을 통한 경쟁력을 확보대신에 한 방을 노리는 한탕주의만 가득하다.


한탕주의는 몇 년 전부터 시장에 만연해있었고 스타트업계로 넘어오면서 극심해졌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모두 AI기술혁명, 불안한 국제질서, 장기침체의 공포 같은 변화에 대비하지 않았다. 인재는 떠나고 투자는 줄고 경쟁력은 하락했다. 혁신을 입에 올린 스타트업계는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수수료장사를 미래먹거리로 포장했다.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대한민국은 내려갈 일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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