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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10. 2024

이제 그냥 놓아주자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기로 했다.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질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하고 하나씩 버리기로 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작은 기대를 품고 살았다. 변화를 바랐다. 하지만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기적이다. 아버지는 그대로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희박한 가능성에 매달리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미련이나 기대를 떠나보내고 단념하기로 했다.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마음속에 여유가 없다. 지금은 내가 버겁다. 지금까지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살았는데 참다가 한계가 찾아왔다.


 성장기는 그림자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덮어놓고 모른 척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착각이었다. 말할 곳이 없어서 입을 닫고 살다 보니 마음도 닫고 살게 됐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나는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물음표가 너무 많았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다 보면 지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느라 힘들었다.


 원망이나 분노는 이미 사라졌다. 내면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날 선 감정을 품고 살다 보면 가슴에 상처가 나고 구멍이 생긴다. 미워할수록 나만 아프다. 가족에게 갖는 양가감정이 쌓이다 보면 마음에 병이 든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미워하다 다시 손을 내밀고 등을 돌렸다가 또다시 돌아서느라 지쳤다. 포기하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담아두지 말고 털어놓고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난 입을 닫고 살았다. 이제는 화낼 힘도 없다. 그냥 공허하고 허무하다. 부모님은 이미 인생의 황혼기를 훌쩍 넘겼다. 기적처럼 변화가 찾아온다고 해도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항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 번듯한 효도는 제대로 못했지만 극심한 불효를 저지른 적도 없다. 처량한 이야기지만 나는 우리 집을 반면교사 하면서 어른이 됐다. 내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옆에 있어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하지만 다정하거나 살가운 아들 역할은 하지 못했다. 그 점에서 늘 죄책감을 느낀다. 한 지붕아래 같은 밥을 먹는 식구였지만 우리 가족은 단절된 삶을 살았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가족이 자신을 몰라준다고 여겼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는 세월만 흘려보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은 결국 납득하게 된다. 이것도 삶이다. 이렇게 살아도 인간이다. 그런 맘으로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제대로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느낌표보다 물음표가 많다. 나이가 들었지만 부모가 된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나이 들어가는 삶을 상상하기 힘들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 사랑을 주는 부모의 역할을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잘 모르겠다. 걱정이나 기억은 떠올리면 줄줄이 따라 나온다. 브레이크가 없다.


 요즘은 무너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태다. 감정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비슷하지만 내면의 환경은 기후와 닮았다.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내 속을 들여다보면 황량한 폐허 같은 풍경이 펼쳐져있다. 마음이 제자리를 찾고 여유가 생기면 내 안에도 풀과 나무처럼 싱그러운 감정이 자라면 좋겠다. 지금은 나를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에만 신경 쓰려고 한다. 벌써 12월 중순이다. 곧 크리스마스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 로비에 커다란 트리가 서있다. 길거리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여기저기에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트리의 불빛을 보고 있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어린 시절 매년마다 우리 가족은 교회에서 트리를 장식했다. 외동인 나는 교회 형누나들이랑 같이 보내는 이브와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새벽송을 부르고 음식을 나눠먹고 산타모자도 썼다. 사람들로 붐비는 크리스마스가 생일보다 더 좋았다. 30년 가까이 된 아련한 기억이다. 사람들은 해마다 교회를 떠났다. 우리 가족 셋만 남았다. 크리스마스가 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엄마가 있는 병원에서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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