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살면서 힘들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을까? 친구나 연인을 비롯해서 진심을 나누는 관계들이 있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안문제나 가정사가 담벼락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믿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유교적인 가치관과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분이었다. 자식은 부모라는 그늘 아래 자란다. 좋든 싫든 나도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살았다. 납득할 수 없는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서 혼란상태에 빠졌고 그냥 침묵했다. 너무 빨리 어른아이가 됐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서로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벗어날 수 없는 계명이자 족쇄였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엇나가면 고생만 하는 엄마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았다. 집을 떠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다. 조용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돼서도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 우울감과 공허감이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았다. 내 감정을 정의할 수 없었다. 속을 들여다봐도 엉망으로 뒤엉켜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과거를 돌아보고 제대로 마주할 용기도 여력도 없었다. 우울감과 무기력에 짓눌려 무너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성장기의 상처가 성인기까지 이어지면서 내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마도 내 마음의 모양을 시각화한다면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상태였을 것이다. 목사의 아들로 사는 동안 나는 늘 괴로웠다. 어린 시절 내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바위처럼 무거운 현실을 짊어지고 살았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없어서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감정을 정의하고 또렷한 이름표를 붙일 수만 있다면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과정은 분명 고통스럽겠지만 받아들이면 통증의 원인을 알 수 있다. 모르고 아픈 것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뗐다. 사람들에게 털어놓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닫아놓고 회피하고 덮어놓고 모른 척했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해법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간신히 현상유지를 하면서 지냈다.
나약하다고 자책하고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우울감이 장맛비처럼 쏟아지고 나면 그늘 아래 독버섯 같은 자기혐오가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초라한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사람들을 만나고 관심사를 찾아다녔다. 그래도 마음은 늘 불편하고 괴로웠다. 어디에도 쉴 곳이 없었다. 집이나 밖이나 제대로 마음 놓고 있을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만든 피안의 세계이자 고통에서 자유로운 피난처였다. 괴로울수록 화려한 그림이 나왔다. 외로울수록 따뜻한 주제의 글을 썼다. 내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썼다.
정말 드물게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 소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상상을 했다. 내가 사라지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을 덜고 무기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고통이 클수록 역설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마음도 강해졌다.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씩 내면의 심지가 꺾일 때마다 긴 후유증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타인의 실패를 핑계로 고통은 근성 같은 단어로 맞받아친다. 내 삶을 설명하면서 상대를 설득할만한 열의는 없었다. 입과 맘을 닫고 가면을 쓰고 지냈다.
나는 자주 실패하고 수시로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가 만든 고립 속에서 침묵한 채 살았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면서 소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지난 과거도 얼룩진 과거도 나의 일부다. 아픔을 삶의 일부로 인정하려면 맞이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로 했다. 내면을 들여다볼 용기를 냈다. 과거의 상처를 대면하는 것은 두렵다. 하지만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념하고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려면 괴로워도 용기를 내야 한다. 하지만 맘처럼 되지 않는다.
글쓰기를 통해 기억을 돌아보면서 감정을 정리하는 중이다. 과거를 들여다보는 힘겨운 작업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 걸렸다. 나아지는 데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린 나이였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나를 몰아세웠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성장기의 사건들을 기억 속에 강제로 묻었다. 나의 나약함을 비난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과거로부터 도망쳤다. 여전히 괴롭고 아프다. 두려워서 회피하고 무서워서 외면했던 것들을 이제 천천히 조금씩 살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