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진심이 담겨있겠지만 늘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다. 죽을힘을 다해서 살라는 말이나 죽을 용기로 살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갈림길 앞에서 고심하는 이들은 이미 수없이 용기를 냈다. 있는 힘없는 힘 쥐어짜 내면서 버텨온 것에 가깝다. 무기력이나 공허감은 게으름이나 무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힘을 다 쓰고 결국 무력감만 남은 것이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사느라 늘 내면의 여력을 소모하게 된다. 평범해 보이는 삶을 연기하느라 에너지를 쓴다.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려고 밝고 기운찬 모습을 연기하면서 무리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이면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설령 알게 되더라도 현실을 들먹이면서 힘내라는 말을 건넨다. 위로를 가장한 조언과 다들 힘내서 살아간다는 표현은 듣는 이를 죄인으로 만든다. 죄책감은 무력감과 만나면 강렬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죄책감은 자괴감으로 변하고 결국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 겉모습이 엉망이 되면 주변의 걱정을 산다.
하지만 내면이 처참하게 무너진 인간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낯빛은 오히려 평온해 보인다. 포기하면 편하다. 전부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집착이나 고민은 점점 희미해진다. 사람도 삶도 더 이상 나와 상관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나면 가벼워진다.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면서 마음속에 품도 있던 애착도 같이 소멸한다.
비바람을 피하고 눈보라를 맞으며 고군분투했지만 이제 더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향해 붙잡고 있던 손을 서서히 놓는다. 여간해서는 티가 나지 않는다. 좀처럼 티를 내지도 않는다. 옆에서 보면 전보다 좋아 보인다. 한결 나아진 것 같아서 이제 다 괜찮아진 것 같다. 하지만 슬픈 착각이다.
사람의 마음을 타인을 알 수 없다. 낳아준 부모도 같이 자란 가족도 속을 알 수 없다. 나도 나를 제대로 몰라서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아픔을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는 정확하게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다. 왜 아픈지 이유를 찾는 것도 어렵다. 인지하기도 힘들고 자각하면 그때부터는 괴롭다.
트라우마를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소년기에 겪은 고통을 잊고 살다 노년기에 심리적인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저절로 사라지는 고통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은 약이 아니다. 망각은 잊게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아픔을 없앨 수는 없다. 알아서 때가 되면 낫는다는 말은 착각이거나 거짓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오래된 상처가 여전히 붉게 물들어있다.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면서 휴지기와 잠복기를 거칠 뿐이다. 살아있는 한 고통은 계속되고 쉼 없이 지속된다. 늦은 밤 도로 위로 튀어나오는 야생동물처럼 갑자기 찾아와서 삶을 엉망으로 헤집어놓는다. 고삐를 단단히 쥐고 사느라 겉은 멀쩡해도 속은 늘 녹초가 된다.
생떼 쓰는 아이같이 멋대로 구는 마음을 달래고 삶의 끈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들이 곁에 있어도 가슴속 심연에 담아둔 상처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매번 망설이다 항상 단념한다.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손을 흔들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불 꺼진 방 침대에 누운 채로 남아있는 하루를 마저 흘려보낸다.
쓸쓸하게 혼자 이불을 덮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잠드는 것처럼 죽고 싶고 죽은 듯이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아침이 오면 늘 그랬듯이 다 똑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할 일을 하다 보면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다 잠시 평온함이 찾아온다. 하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는 없다.
정말 괜찮은 것인지 아니면 괜찮은 척하면서 버티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한 때는 답을 알고 싶었는데 이제는 몰라도 별 상관없을 것 같다. 마음이 지치면 의욕이나 의지는 사라진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힘을 내고 싶은데 힘을 다 써버렸다. 이런 속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정을 누가 알까? 이해는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