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씩 시집을 읽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작가 한강의 시집을 골랐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부터 인상적이었다. 나는 늘 제목에 눈길이 가는 시집을 고른다. 강아지가 품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가슴을 치고 들어오면 자연스레 손길이 간다. 자리에 앉아서 첫 장을 펼쳤다.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었다. 감정의 과잉 없이 담담하고 덤덤한 문장과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잊고 지냈던 감각을 오랜만에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내친김에 책장에서 시집을 여러 권 꺼내왔다.
가방에 늘 시집을 넣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꺼내 읽던 시절도 있었다. 기형도를 유난히 좋아했다. 대학교 도서관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뒤엉켜있는 그의 문장을 사랑했다. 유일한 수필집인 <짧은 여행의 기록>도 여러 번 읽었다. 휴학하고 자주 기차여행을 떠날 때마다 시집을 챙겼다. 시는 설렘과 공감을 안겨주는 편안한 친구 같았다. 시인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크고 작은 위로를 받았다.
섬세한 단어들이 품고 있는 떨림과 울림을 남몰래 하나씩 주워 담는 일은 독서가 주는 큰 기쁨이었다. 좋은 시를 발견하면 보물을 찾은 것처럼 행복했다. 나를 아끼는 누군가가 나 몰래 남겨놓은 선물 같았다. 자주 들여다보면서 시가 주는 소박하면서도 충만한 만족감을 음미했다. 노트를 사서 좋아하는 시를 필사하고 하단에 느낀 점을 기록했다. 오래된 독서노트를 가끔씩 꺼내 읽어본다. 잊고 살았던 지난 시절이 하나둘씩 생각난다. 내밀한 기록은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 말해준다.
살아온 날들이 예쁜 문장과 함께 노트 속에 담겨있다. 한강의 시를 한 글자씩 꼼꼼하게 필사했다. 선물처럼 찾아온 좋은 시는 간직하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김중식의 <황금빛 모서리>를 여러 권 사서 지인들에게 건넸다. 시집을 선물하고 나면 종종 답례로 새로운 시집을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소중한 마음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으로 쓴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의 설렘과 많이 닮았다. 온기를 품고 있는 단어를 한 아름 안고 기뻐했던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중고책방을 다니면서 책장을 주기적으로 비우고 채우는 작업을 반복했지만 시집은 그대로 남아있다. 유난히 힘든 겨울을 보냈다. 겨울의 문턱을 넘어설 때쯤 봄이 너무나 멀어 보였는데 벌써 3월이다. 봄이 찾아왔다. 따스한 계절에 맞는 시를 찾아다 밥처럼 챙겨 먹어야겠다.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늘 그랬듯이 책을 붙잡았다. 나보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의 경험담을 동아줄 삼아 버텼다. 절망 속에서 끝까지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믿었다. 덕분에 나무와 꽃처럼 나도 살아남아서 봄을 맞이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