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날씨다.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는 산뜻하다. 겨우내 낮게 가라앉아있던 그늘진 한기는 자취를 감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어두운 겨울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터널 밖은 환한 빛으로 가득한 별천지였다. 음울한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마음이 대낮처럼 새하얘졌다. 공원 여기저기 마른 나뭇가지 위로 올라온 꽃눈이 보인다. 몇 주만 지나면 하얀 벚꽃이 온 세상을 물들일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봄날을 기다리는 설렘은 이유가 필요 없다. 그냥 봄이라서 좋다.
봄맞이 청소를 했다. 분리수거를 끝내고 세탁기를 돌렸다. 옥상에 빨래를 널었다. 빨래 널기 딱 좋은 날씨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이마를 쓸고 지나갔다. 친구를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올해 첫 리넨셔츠를 개시했다. 크림색 와이드팬츠에 발이 편한 크록스를 신었다. 어제저녁에는 패딩을 입었는데 하룻밤새 계절이 달라졌다. 완연한 봄기운을 느끼기 충분할 만큼 따뜻했지만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다. 수리산너머 보이는 뿌연 먼지구름이 거스러미를 이루고 있었다. 마스크를 챙기길 잘했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시야를 가리는 희뿌연 커튼을 쳐도 봄날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나미 아사의 단편 <마지막 꽃다발>에는 봄을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 봄바람이 불어오자 먼지투성이이긴 하지만 역시 마음이 살랑거립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오늘이 꼭 그런 날이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와서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명학역 건너편에 있는 신라명과 라운지에 갔다. 야외테라스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오랜만에 같이 광합성을 했다. 시시콜콜한 한담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온몸으로 봄햇살을 받았다.
괴롭고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밖에 나가서 햇살을 쬔다. 그늘과 볕이 만드는 경계선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먼지처럼 부산스럽게 일어났던 불안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힘들수록 눈길과 발길 모두 자연을 향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사람도 동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다친 몸을 치유하려고 산과 숲을 향해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짐승처럼. 자연을 찾는다. 저녁에는 별을 보러 만안청소년수련관 옥상정원에 자주 올라간다.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어두운 내면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한 바람이 불었다. 겨우내 말라있던 가지들이 새순을 달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내일은 겨울 내내 입고 다녔던 아우터를 세탁소에 가져가야겠다. 꽃샘추위가 남아있지만 이제는 봄이다. 코트를 꺼내 입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어둡고 긴 겨울을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일교차가 큰 날씨가 이어지더라도 계절을 거스를 수는 없다. 무거운 불안감과 두터운 우울감을 이제 벗어버려야겠다. 조금 더 가벼운 기분으로 봄을 맞이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