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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

by 김태민 Mar 26. 2025
김태민, <찬란>, 달력커버에 크레파스, 24x35cm.김태민, <찬란>, 달력커버에 크레파스, 24x35cm.

 언제 봐도 좋은 친구처럼 숲에 갈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내가 사는 안양8동은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산림욕장이 있다. 주말만 되면 1호선과 버스를 타고 등산객들이 찾아온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상록마을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입구가 나온다. 시멘트를 발라 얼기설기 마감한 계단을 하나 둘 밟다 보면 어느새 발 밑이 푸릇한 색으로 물든다. 마음이 슬플 때나 삶이 고단할 때 버릇처럼 산을 탔다. 동네 뒷산 치고는 제법 가파른 산길을 찾아서 땀을 비처럼 쏟았다.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몸과 마음이 금세 가벼워졌다. 한참 걷다 쉼터 벤치가 나오면 앉아서 한숨 돌렸다. 새소리와 벌레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꽃과 나무처럼 가만히 바람을 맞는다. 등줄기를 쓰다듬고 멀리 떠나는 산바람의 손길이 부드럽다. 물병을 가방에서 꺼내 물을 마시면서 주변 풍경을 둘러본다. 고개를 들어보면 매일 보던 하늘이 반으로 줄어들어있다. 곧게 뻗은 울창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덮었다. 빽빽한 나뭇잎 사이를 지나면서 하얀 햇살이 푸른빛을 담았다.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서 종종 시집을 읽었다. 박준, 신해욱, 박지일 같은 시인들의 시를 꺼내 여름 이불처럼 덮었다. 일상의 언어로 섬세하게 짠 고운 말을 떼다 상처에 붙였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일렁이는 온기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더운 김이 꽃처럼 피어오르는 밥공기를 양손으로 감싸 쥔 것 같았다. 사람 그림자 보이지 않는 등산로 한가운데서 나는 속으로 여러 번 울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검은 부엽토 위로 잘게 부서진 빛의 알갱이가 하얗게 흩어졌다.


 바람이 떠나고 나면 고요함만 남는다. 마음을 씻고 일어나서 다시 산길을 걸었다. 머리칼을 헝클어뜨릴 만큼 세찬 바람을 맞고 나면 개운해졌다. 산을 타고 내려와서 익숙한 풍경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그때마다 나는 삶을 덤으로 얻었다고 생각했다. 산 아래 동네에서 산지 20년이 넘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 늘 산의 이마가 보인다. 구름을 두르고 계절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우리는 함께 눈 같은 세월을 맞았다. 매일 보고 살다 보니 산이 친구처럼 느껴진다. 매일 보는 친숙한 얼굴들이 같이 떠오른다.


 한동안 명학공원과 안양천변을 산책하느라 숲을 찾지 않았다. 이른 저녁 청소년수련관에서 운동을 하고 나와서 오랜만에 산길에 올랐다. 땅거미가 물러가면서 작년 가을에 쌓인 마른 낙엽을 환하게 물들였다. 가지마다 돋아난 연둣빛 새순에 눈길이 닿았다. 겨울을 이겨낸 나무들은 저마다 꽃눈을 달고 4월을 기다린다. 물기가 느껴지는 산속 공기는 맑고 향기롭다. 숲 속에서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눈에 담았다. 마음이 평온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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