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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책 그리고 성냥

by 김태민

사람들은 저마다 고통을 안고 산다. 유형만 다를 뿐이다. 고통은 철저한 독립시행이다. 내가 느끼는 아픔은 결코 남이 느낄 수 없다.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껴도 남은 내가 아니다.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관계 속에서 회복해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내면 깊은 곳의 흉터는 아무도 모르게 한 번씩 덧나고 벌어진다. 그러다 보면 통증을 떨쳐내고 싶어서 약을 찾는다.


치료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중독이 시작된다. 타인에게 위협이 되거나 불법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중독은 몰입이나 취향이라는 단어로 바꿔 부를 수 있다. 과거의 나는 활자중독자였다. 사는 게 괴롭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책 속을 파고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책에 중독됐었다. 도서관은 피난처였고 책은 도피처였다.


말보다 글이 편했고 사람보다 책을 선호했다. 어디를 가든 글자나 숫자를 찾았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고 시선을 발치에 두고 걷는 아이 같았다. 하루 종일 책을 끼고 살았고 어디를 가든 책을 가지고 다녔다. 걸어 다니면서 책을 보다 사고가 날 뻔했다. 눈을 혹사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력도 나빠졌다. 심각성을 인지하고 겨우겨우 활자중독자 생활을 청산했다.


술이나 약물이 아니었을 뿐 나 역시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책을 골랐다. 만약에 선택유형이 달랐다면 몸이 망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는 동안 괴로운 순간이나 머리 아픈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다시 갑갑한 현실로 돌아왔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막막한 탈력감이 싫어서 잠들기 직전까지 책을 읽었다. 눈보라 속에서 쉼 없이 성냥을 당기는 소녀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중독의 본질은 괴로움과 외로움이다. 둘을 잊고 싶다는 강렬한 본능이 욕구나 결심을 만나면 중독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다거나 의지나 근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반쪽짜리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우리는 서로의 속을 알 수 없다. 몇 가지 가면을 쓰고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을 치고 산다. 피곤하고 지겨운 일이다.


그러다 소화되지 않는 아픔이 내면에 차츰 쌓이게 되면서 결국 안에서 무너져 내린다. 중독에 관한 일반화나 합리화가 아니다. 책 속에 파묻혀 살았던 시기의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손을 뻗을 용기도 없었고 손을 내밀 여력도 없었다. 그 순간 손 닿을 곳에 사람 대신에 책이 있었다.


바깥세상으로 향해야 할 손길의 방향이 잘못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극심한 우리 사회의 중독문제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돌아보면 책 속에 파묻혀 지냈던 시기의 나는 외롭고 괴로웠다. 유형은 달라도 중독이 지배하는 삶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다 타버린 성냥을 손에 쥐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어두운 터널 속을 오래 헤매다 보면 하얀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출구가 두렵게 느껴진다. 터널 속은 거울이 없다. 스스로를 새까만 때가 덕지덕지 뭍은 더러운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칠흑 같이 어두운 터널 속의 어둠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출구 앞에서 등을 돌린다. 겨우 용기를 내더라도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때마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힘들면 다시 터널로 기어들어올 것 같았다. 상상 속의 초라한 내 모습을 떠올리면 속에서 자기혐오가 솟구쳤다. 좌절과 분노가 뒤섞인 죄책감은 떨쳐낼 수 없는 무거운 족쇄가 됐다. 그러다 감정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소극적인 저항이자 현실을 받아들이는 작은 시도였다. 나만 아는 언어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먼지 쌓인 감정을 표현했다.


짧은 메모는 형식을 갖춘 문장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편의 글이 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지럽게 내면을 떠돌던 나비 같은 말들을 몰래 채집했다. 잊고 살았던 순간이나 기억들을 퍼즐을 맞춰나가듯이 정리했다. 감정을 글로 기록하게 되면서 차츰 속마음을 조금씩 말할 수 있게 됐다. 마음은 날씨와 같아서 어지러운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온다.


여유와 용기는 같이 온다. 현실은 그대로지만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고통스러운 날들을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활자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래 걸렸다. 바닥과 지하를 왔다 갔다 하느라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 허송세월이었지만 더는 아쉬워하지 않는다. 지난 과거는 좋든 싫든 경험이 됐다. 후회는 씨앗이 될 수 없지만 경험은 밑거름이 된다.


잃어버린 것들을 세지 않기로 했다. 남은 것을 센다. 텅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삶은 계절이다. 살기 좋은 계절이나 나쁜 계절은 없다. 고운 봄은 살을 에는 꽃샘추위를 품고 있고 찌는 여름의 끝은 선선한 가을로 이어진다. 좋았다 나빠지고 괜찮다가도 엉망이 된다. 날씨나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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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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