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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빨래

by 김태민

화창한 날이다. 기온은 높고 습도는 평소보다 낮다. 빨래하기 정말 좋은 날씨다. 이불도 반나절이면 마를 것 같다. 그동안 차일피일 미뤘던 이불빨래를 해야겠다. 올봄은 유난히 일교차가 심했다. 한낮에는 리넨셔츠를 입을 만큼 더웠지만 밤이 오면 기온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그래서 5월 중순까지 겨울이불을 덮고 지냈다. 이제는 여름이불을 꺼낼 때가 됐다.


겨우내 덮고 살았던 두꺼운 이불을 세탁기 속에 밀어 넣었다. 세재를 붓고 코스를 설정했다. 세탁완료까지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이불을 둘러업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랫대에 이불을 잘 펴서 널었다. 꼭 커다란 동물의 가죽 같았다. 하얀 여름 햇살이 그 위에 선명한 줄무늬를 그려 넣었다. 볕에 물든 겉감이 태피스트리처럼 보였다.


물기를 털어내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연청색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투명한 물방울이 묻어날 것 같다. 여름하늘은 봄하늘보다 연한 빛을 띤다. 공기 중에 물기가 늘어나면서 푸른색이 희석된 것 같다. 옥상 창고에 놔둔 캠핑용 의자를 꺼냈다. 그늘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투명한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지나간다.


지난겨울 눈이 무릎까지 쌓여있던 옥상은 꽃을 단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조금 늦거나 이를 때도 있지만 계절은 틀리는 법이 없다. 좋든 싫든 흐르는 시간은 결국 세월이 된다. 이불 빨래를 끝으로 길고 어두웠던 겨울도 끝났다. 괴로울 때마다 이불속으로 숨었다. 마음을 다친 나는 껍질을 잃어버린 달팽이 같았다. 두꺼운 이불속을 파고 들어갔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밤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환한 낮이 와도 내면에 드리운 그늘은 그대로였다. 발꿈치에 달라붙은 새까만 그림자는 길어지거나 짧아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감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가라앉는 동안 폐부 깊숙한 곳까지 공허감이 밀려들어왔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숨죽인 채 그저 매일매일을 흘려보냈다.

몸은 살아있는데 마음은 완전히 죽어있었다. 틈 날 때마다 시간을 죽였다. 시체나 다름없는 삶의 잔해는 분해되지 않고 일상에 차곡차곡 쌓였다. 생기를 잃으면서 생활은 차츰 부패했다. 열패감과 우울감이 풍기는 냄새가 몸에 배일 때쯤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수시로 휘청이고 자주 일희일비했다.


같은 자리를 맴돌거나 주저앉아서 시간을 낭비한 적도 있다. 전진은 더디게 후퇴는 빠르게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살았다. 그러다 한 번씩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았다. 못난 짓거리로 치부했는데 합리화를 해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삶은 야구와 닮았다. 연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시즌 최하위가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승리의 여신이 건네는 미소는 매번 상대가 바뀐다. 하지만 가능성은 배트를 휘두르고 글러브를 낀 선수들의 손안에 있다. 계절은 조금 늦을지라도 결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번데기가 아무리 두꺼워도 나비를 집어삼킬 수는 없다. 때가 되면 누구나 껍질을 깨고 나온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과 같다. 새는 단단한 알껍질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질긴 고치를 찢으면 나방은 커다란 날개를 단다.


두꺼운 겨울이불은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으면서 천천히 마르는 중이다. 눈앞에 나약한 마음을 덮고 있었던 번데기의 잔해가 놓여있다. 해야 할 일과 해결해야 할 일이 잔뜩 쌓여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모르는 문제들이 내 앞에 한가득 놓여있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삶은 정답이 없다. 실패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전보다 조금 나아지면 된다.


종종 절망하고 자주 실망하겠지만 소망이나 희망의 질감을 잊지 않는다면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거 별 것 없다.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 큰 일도 지나고 보면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기는 것 같다. 마음이 무너져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은 늘 한결같다. 나를 둘러싼 풍경은 그대로다. 파고들었던 이불 밖으로 나와서 원래 내가 서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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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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