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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 속에서

by 김태민

달팽이는 껍질을 이고 다닌다. 위기를 감지하면 언제든지 껍질에 몸을 숨길 수 있다. 껍데기는 달팽이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다. 하지만 등껍질은 결국 몸의 일부일뿐 진짜 집이 될 수 없다. 어두운 껍데기 속에서 느끼는 안락함은 현실도피에 불과하다. 내부는 어둡지만 밖은 환한 대낮이다. 모두가 내일을 향해 걸어갈 때 홀로 지난밤에 머물러있는 삶. 아무도 몰래 그런 시간을 보냈다.


달팽이처럼 껍데기를 끼고 살았다. 마음이 꺾인 상태로 지냈다. 나는 연못 위를 떠다니는 작고 초라한 개구리밥 같았다. 모두가 찬란한 여름을 보내는데 나만 차가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자존감이 높았던 만큼 추락할 때 충격은 컸다. 망가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숨었다.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상처 입은 몸을 말고 껍데기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내가 사는 세상은 꼭 내 방 만했다. 창문을 열면 공원과 오피스빌딩 그리고 아파트가 보인다. 바깥세상은 한 뼘거리에 있다. 손 닿을 곳에 있지만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좀처럼 마음이 닿지 않는다. 웅크린 태아처럼 동그랗게 굽었다. 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도 마음은 껍데기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날개를 달고 여기저기 날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했다.


살아온 날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부질없어 보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면서도 태연하게 지냈다. 안부를 묻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다 힘들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정말 다 괜찮아졌다고 착각하게 됐다. 메서드 연기를 하는 배우가 배역에 잠식당하는 것처럼 나는 나를 집어삼켰다.


감자나 고구마를 입에 욱여넣는 것처럼 내면 깊은 곳에 쑤셔 넣었다. 희로애락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이 점점 희미해졌다. 좋은 일이 생겨도 기쁘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사실마저 종종 잊어버렸다. 그럴수록 현실을 더 숨기고 싶었다. 내면에 드리운 그늘을 가리고 싶어서 긍정을 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그림을 그리고 긍정과 희망을 담은 글을 썼다.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려고 애썼다.


사실은 남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극적이었지만 현실과 맞서는 저항이자 반항이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다른 방법을 몰라서 너무나 답답했다. 선택과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하는 현실은 막막하고 무서웠다. 그럴 때마다 달팽이처럼 몸을 말고 껍데기 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깊게 잠들 수 없는 환한 오후의 낮잠처럼 늘 불안하고 불편했다.


밝게 살고 싶어서 햇살이 드는 쪽을 향해 걸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수시로 공허하고 자주 허무했다. 단순한 그늘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늘은 발치에 달라붙은 내 그림자였다. 기댈 곳이 없는 인간은 숨을 곳을 찾는다.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껍데기 속을 더 깊숙하게 파고들어 갔다. 어두운 굴속에 처박혀있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서 세월이 됐다.


후회와 아쉬움은 끝나지 않는 겨울밤처럼 길게 이어졌다. 잃어버린 것들을 세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놓쳐버린 기회를 곱씹으면서 되새김질했다. 전진을 멈추고 점점 퇴보하고 있었다. 고등동물에서 본능만 남은 원생동물로 퇴화하는 것 같았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나락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다 진짜 밑바닥에 도달했다. 더 이상 쥐어짜 낼만한 긍정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신기하게도 역설이 찾아왔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으므로 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는 기묘한 용기가 생겼다. 진짜 긍정을 내면의 밑바닥 아래에서 발견했다. 껍데기 속이 너무나 좁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용기는 곧 오기로 변했다. 마음을 비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을 뗐다. 그만뒀던 도전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 도전은 작지만 또렷한 성과로 돌아왔다.


건물이 무너지면 빈터에 다시 건물을 세워야 할 때가 온다. 그러려면 터를 닦고 지반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껍데기 속에서 보냈던 날들은 터를 닦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과는 가치를 보여주지만 과정은 의미를 드러낸다. 고립된 채 흘려보낸 시간이 괴로웠던 만큼 의미가 갖는 무게감은 또렷했다. 안에서 잠긴 문을 열고 출구로 나왔다.


들어갈 때만 해도 겨울이었는데 밖은 초여름이다.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면 밝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보니 달팽이껍데기가 아니라 알껍질이었다. 천천히 날개를 펼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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