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기록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다. 온 세상을 녹일 것 같은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내린다. 그늘 찾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양산을 꺼내 들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골목길을 지나다 낯선 풍경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하얀 벽돌 담장 위에 청포도가 걸려있었다. 포도나무 덩굴 사이로 잘 익은 포도가 매달려있는 모습이 꼭 조선시대 민화처럼 보였다.
마당 안에 감나무를 둔 집들은 종종 봤지만 포도나무를 심은 심은 집은 참 오랜만이다. 처음 명학에 이사 올 때만 해도 마당에 나무를 심은 집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재개발로 사라진 상록마을은 텃밭을 가꾸는 주민들이 많았다. 우리 집도 옥상에 토마토와 블루베리를 키웠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포도는 안양시의 상징이자 특산물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은 공장단지가 들어서기 전의 안양은 전부 포도밭이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산업화 초기에는 90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포도밭이 존재했다. 도시의 역사를 기록한 책 속의 오래전 안양은 푸른 산과 들이 펼쳐져 있는 자유로운 땅이었다. 수리산과 관악산 그리고 삼성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양의 지형은 분지에 가깝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좋아서 포도를 재배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다. 안양포도는 교과서와 지도에도 표기될 만큼 잘 알려져 있는 명물이었다. 수원딸기, 부천복숭아와 함께 경기 3미로 불렸다. 어렸을 적에 먹었던 안양포도는 정말 맛있었다. 신맛 하나 없이 달고 부드러워서 누구나 좋아할 만했다.
여름저녁 엄마 손잡고 덕천시장에 가면 꼭 포도를 샀다. 소쿠리에 담은 포도를 파는 청과점 앞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석수동과 비산동 그리고 인덕원에서 재배한 안양포도는 전국적으로 사랑받았다. 소설가 채만식은 서울사람들이 여름만 되면 안양에 와서 피서를 즐기고 포도를 먹었다는 내용의 수필을 남겼다.
광복 전부터 포도농사로 유명했다는 기록만 봐도 안양포도의 명성을 알 수 있다. 90년대만 해도 안양은 포도농사를 짓는 농장이 적지 않았다. 한여름에 석수동이나 비산동을 지나다 보면 키 낮은 포도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포도농원을 볼 수 있었다. 인덕원은 도로 주변에 포도판매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도로변에 차를 멈춰 세우고 농장주와 직거래를 하는 모습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더는 안양포도를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리운 것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포도농장이 서있던 자리는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포도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안양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길에 포도원이라는 지명만 남았다. 밭농사를 짓던 농촌은 인구 60만의 도시가 됐다.
세월은 계절과 같다. 안양은 계절에 맞게 여러 번 옷을 갈아입었다. 드넓은 농지는 방직공장과 제지공장으로 변했다. 강산이 바뀌는 사이 오래된 공단은 사라지고 첨단산업단지와 브랜드 아파트가 도시의 새로운 얼굴이 됐다. 포도밭이 푸른 바다처럼 펼쳐져있던 시절의 기억은 멀리 떠난 사람들과 함께 조용히 잠들었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글 속에 담아서 보관하는 중이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잊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다. 초라하게 남지 않게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변화와 성장은 한 몸이다. 안양은 낡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서 미래로 도약했다. 공업도시에서 불과 10년 만에 서울을 제치고 한국 1위의 스마트시티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집 앞으로 자율주행버스가 다니고 AI가 관리하는 통합관제센터가 도시를 운영한다. 과거에 비하면 정말 살기 좋아졌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라진 것들이 적지 않다. 마을은 동네가 아니라 아파트단지를 의미하는 일반명사가 됐다. 외곽으로 밀려난 그림자 같은 사람들만이 도시의 역사를 가슴속에 품고 산다.
지난날의 흔적은 세월 속에 풍화되면서 거의 남지 않았다. 다들 멋진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화려한 변화를 꿈꾸고 있다. 하지만 찬란한 도시의 불빛만 보다 보면 밤하늘의 별빛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억이 갖는 의미와 과거에 깃든 가치가 외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때로는 잠시 멈춰서 달려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온기를 품은 기억들이 사라지거나 외면당하지 않도록 보듬어줘야 한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도 사랑이다. 안양포도는 사라졌지만 시의 상징으로 남았다. 포도밭이 가득했던 안양을 기억하는 이들과 달콤한 포도의 맛을 추억하는 이들이 떠나면 안양은 어떤 도시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