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현재가 되고 다시 과거가 된다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중학교 시절 썼던 일기장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틈틈이 끄적였던 일기와 단편소설, 시 같은 것들이 빼곡히 펜으로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중2병 느낌이라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조금 놀라웠던 게, 지금의 나보다 글씨는 더 잘 썼다는 거다. 지금의 나는 악필에 가깝다.)
화끈거리며 글을 읽어나가다가, 툭 하고 무언가 떨어져서 주웠더니, 웬 편지봉투가 있었다. 편지를 꺼내어 보니, 중3 때 내 반을 담당했던 ‘명희’라는 성함의 교생 선생님이 써 주신 편지였다. 선생님이 아마 교생실습을 끝내면서 반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써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황스러웠던 건, 그 선생님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교생 실습이래 봐야 몇 주밖에 안 됐을 테니,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옆에서 보던 어머니가 ‘너 정말 기억 안 나? 그 선생님이랑 많이 친했었잖아? 네가 반장이라서 옆에서 많이 도와줘서 그 선생님이 무척 고마워했었는데. 엄마는 기억나거든.’ 하시는 거다. 친했었다고? 내가?
그래서 다시 편지를 찬찬히 읽어 봤더니, 반장이 많이 잘 도와줘서 고맙다는 내용과 함께 교생 생활의 애환(?)과 소회가 느껴지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한 장짜리 길지 않은 편지였지만, 확실히 선생님이 나를 아끼셨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중학교 3학년이라고 하면 나로서는 거의 20년 전이다. 그때 나는 학교 생활과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멋도 모르고 법대를 가고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었지. 그때의 나는 이타적이고 선생님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꽤 열심이었다. 교생 선생님께도 잘했겠지, 아마..
그때의 열정과 생각, 고민,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과 교생 선생님의 편지를 보면서, 문득 그때의 내가 생각한 오늘의 내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판검사가 되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을까? 분명한 건, 최소한 지금처럼 평범한 회사원이 될 거라고는, 그리고 교생 선생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10년, 20년 뒤의 내 모습에 대해 강한 자기 확신을 갖는 경향이 있다. 지금의 감정과 생각이 한창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일 거라고 믿는다. 또는 좋은 직장이나 부, 사회적 지위 같이 미래의 성공한 내 모습을 그리며 현실의 즐거움과 안식을 기꺼이 희생한다.
물론 미래지향적 삶도 의미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 ‘엔딩’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교생 선생님도 실습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 교생 실습만 끝나면 선생님이 되어 안정된 직장을 갖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적당한 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막상 선생님을 되었다 하더라도, 하루하루 부닥치는 어려움에 선생님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이 한 번은 있었을 거다. 그리고 결국 회의감을 느껴서 교단을 떠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판검사가 되는 미래를 그리고 준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그렇게 되기 위해 충실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판검사가 되고 나면? 그래서 내가 그리던 미래가 현실이 되고 나서는? 그때에 또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살 것인가?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일상의 즐거움을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10년, 20년 뒤의 미래도, 내가 살아있는 한 언젠가 현재가 되고 다시 과거가 된다. 결혼을 꿈꾸던 연인은 결혼을 하고, 어느덧 달콤했던 연애의 단계는 과거가 된다.
나는 그래서 사진과 추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미래가 모두 결국엔 과거가 된다면, 과거를 의미 있게 만들고 기억해내려는 노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매우 숭고한 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