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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Jan 07. 2023

일상의 나른함과 반짝이는 탁월함 사이에서

그래도 '언젠가'를 꿈꾼다는 것  

쌀을 씻어서 앉히고는 5년 전쯤 출간한 나의 첫 책 <나는 크루즈 승무원입니다>를 아주 오랜만에 펼쳤다가 밥이 다 될 때까지 정신없이 읽었다.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잊혔을 이야기들이 그때의 기억과 함께 훅 밀려들어와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책을 덮으려다가 가장 마지막 장에 내가 인용했던 문구가 눈에 띄었다.

 
 

한 곳에 머물러야만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라면,
우린 다리 대신에 뿌리가 있었겠지.



그땐 그랬다. 국경을 넘나드는 연애를 했고, 적금은 없었지만 대출빚도 없었고, 내 명의의 신용카드도 없이 그때그때 달러를 바꾸어 현금을 썼으며 각종 공과금 납부도, 세금신고도 나랑 상관없는 일이었던, 일 년에도 몇 번씩 대륙을 옮겨 다니던, 온 세상이 내 집 앞마당 같았던 나의 20대와 30대 초반. 만약 당시의 나를 가로막은 것이 단지 코로나였다면 아마도 난 지난 몇 년 동안 바이러스보다도 더 심각한 열병에 시달렸을 것이고, 지금쯤 기어이 다시 항해를 하고 있거나 여행중일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팬데믹 1년 전, 크루즈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스스로 이곳에 작은 뿌리를 내렸다. 사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 알피가 편도티켓을 끊어 한국에 온 게 그 해 9월. 다음 달인 10월에 혼인 신고를 하고 12월에 결혼식까지 마치고 나자 다음 해 1월에 코로나가 터졌다. 제때 비자를 받은 덕에 코로나 이산가족이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처음 해보는 전셋집 계약을 하고, 매달 월급을 쪼개 공과금을 내며 장을 보고 살림을 꾸리는 내 모습은 나 자신에게조차도 생경했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접하는 새로운 일상은 여행하는 삶만큼이나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한국이 처음인 남편 알피와 함께하면서 나도 때때로 외국인의 입장이 되었고,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보게 되니 어쩐지 장기여행을 와있는 기분으로 지난 3년을 보낸 것 같다. 알피는 무더운 여름, 용산의 하와이안 식당에서 요리를 했다가, 영어 놀이 선생님도 잠깐 했다가, 집에서 스페인어 화상 수업을 하며 대학원 공부를 하기 시작하더니 코로나가 사그라들 무렵 석사 학위증을 따내고 지금은 강남의 한 국제학교의 스페인어 교사가 되어 K-직장인의 삶을 사는 중이다. 알피는 자신이 공부하는 교육공학을 접목하여 틀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적인 수업을 하는데, 난 그가 종종 눈을 반짝이며 격양된 목소리와 열정적인 손동작과 함께 자신이 학생들과 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나에게 열렬하게 설명하는 모습을 사랑한다. 그 반짝임과 생동감이 한국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한다.  


그래도 탁 트인 바다를 항해하던 시절이 그립고, 각종 파티와 시끌벅적 다이내믹했던 지난날들이 한 여름밤의 꿈같을 때가 있다. 일상을 즐겁게 지내다가도 ‘20대 후반의 내가 꿈꾸던 여행 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은 나에게서 멀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드는 것이다.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생각에 잠깐 우울해지기도 했다. 당장 올겨울에 가려고 했던 멕시코 여행 계획을 접어야 했으니까. 그렇지만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해온 도전과 성장을 되짚어보면 마냥 섭섭하지만은 않다. 게다가 임신 25주, 뱃속의 바다(태명)가 나를 톡톡 치는 이 느낌은 이국적인 기항지에 첫 발을 내딛는 것 이상으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세계 여행을 할 만큼 했으니 일상의 여행을 지나 이제는 내적 여행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여전히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들을 좋아한다. 


언젠가는 나와 알피와 바다가 영어와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자유롭게 섞어가며 재즈를 연주하듯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유카탄의 해변 근처에 베케이션하우스를 마련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플로리다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며 부모님을 초대해 함께 크루징을 할 것이고, 언젠가는 일 년마다 한 번씩 유럽의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아볼 것이다. (언젠가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이 모든 언젠가가 좀 더 빨리 이루어질텐데) 


하루를 살다보면 예상가능한 일상의 편안함에 나른해지기도 하고, 반짝이는 탁월함이 발동하기도 한다. 그 사이를 오가며 '언젠가'를 꿈꾸는 요즘이 꽤 나쁘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리하듯이 글이 써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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