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코끼리가 모셔온 다이애나 할머니
6월 초인데도 아침부터 꽤 더웠다. 축 늘어진 시금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알피가 부스스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핑크 엘리펀트 때문에 한 잠도 못 잤어"
잠깐.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핑크 엘리펀트' 즉 분홍 코끼리에 대해서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끼리 통하는 암호 같은 단어 중 하나인데 '엉뚱한 생각' 내지는 '마법처럼 훅 하고 솟아난 아이디어' 같은 것이 떠오를 때 우리는 빙고를 외치듯 '핑크 엘리펀트'를 외친다. 분홍 코끼리가 언제 나타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어떤 때는 구름처럼 쓱 다가와 '이봐, 칠레에 가보는 건 어때?' 하며 코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노크는커녕 문을 부수고 쿵쾅쿵쾅 쳐들어와 '지금 당장 책을 한 권 더 써내란 말이야!' 하며 순식간에 머릿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곤 한다. 물론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코빼기도 안 보일 때도 많다.
나와 알피는 이 분홍 코끼리가 출현할 때마다 서로에게 알리고, 이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존재에게 먹이와 잠자리를 제공해줄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게 놔둘 것인지 논의한다. 다행히도 우리를 찾아오는 코끼리들은 고집이 센 편은 아니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잘 타이르면 다음을 기약하며 유유히 걸어 나가곤 한다.
그동안 분홍 코끼리들 덕분에 우리는 각자, 또 함께 많은 모험을 했다. 세계를 누비며 크루징을 하고, 내가 지난 4년 동안 멕시코에 세 번이나 다녀오고, 함께 치아파스 배낭여행을 하고, 알피가 편도 티켓으로 한국에 오고, 결혼식을 올리고, 비자를 받고, 지금의 우리만의 공간에서 함께 살게 된 것도 코끼리들의 공이 컸다.
"이번엔 아주 큰 놈이었어. 자꾸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잖아"
잠을 잘 때만큼은 생각의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단순한 두뇌회로를 가진 나와는 달리 알피는 좀 더 섬세하고 예민한 편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다가 짠하고 분홍 코끼리가 나타나는 순간 게임 끝. 그날 밤 잠은 다 잔 거다.
"말해봐. 이번엔 또 뭔데"
"우리가 좋아했던 <줄리 앤 줄리아> 영화 있잖아. 그런 프로젝트를 우리도 해보는 거야."
"너는 줄리아의 레시피대로 하루에 요리 하나씩 만들고 나는 블로그에 글 쓰는 거?"
"그건 프랑스 요리이고, 이건 멕시칸 버전이야. 다이애나 케네디! 넌 아마 모를 거야. 도대체 이걸 왜 이제야 생각해낸 거지? 멕시코에서 요리 좀 한다는 셰프들은 이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내가 다이애나의 레시피대로 하루에 하나씩 요리를 하면 너는 그 음식을 먹고 글을 쓰는 거야. 어때?"
그는 재빨리 구글에서 '다이애나 케네디'를 검색하여 나에게 보여주었다. <줄리 앤 줄리아>의 줄리아가 프랑스 음식을 사랑한 미국인이었다면, 다이애나는 멕시코 음식을 사랑해서 미쵸아칸에 눌러앉은 영국인이었다. 미국 전역에 진정한 멕시코 가정식에 대한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킨 멕시칸 요리계의 줄리아라고나 할까. 그녀는 1982년에 멕시코에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격인 아즈텍 독수리 훈장도 받았는데 영화 속 줄리아처럼 그녀에게도 500여 개가 넘는 요리 레시피를 담은 책이 있었다.
"잠깐만. 그런데 이 분.. 1923년생? 97세? 살아계신 거 맞지?"
"그러니까 당장 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멕시코로 날아가서 이 멋진 할머니를 만나야 하니까."
친애하는 다이애나 할머니.
어제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져 당신의 요리책 두 권을 주문했어요. 책이 도착하면 매일 레시피 하나씩을 요리할 거예요. 알피가 요리를 그릇에 담아내면 저는 모든 과정을 글에 담아내는 거지요. 물론 맛있게 먹은 후에요.
일단 알피에겐 익숙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향신료와 식재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찾아 헤매야'하는 것들이네요. 우리의 목표는 최대한 본연의 재료를 찾아내서 만드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불가능하거나 멕시코 시장에서 3달러면 살 수 있는 말린 치뽀뜰레를 이십 배나 더 주고 해외배송으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의 비슷한 식재료로 대체하려고 해요. 그러니 우리가 할머니의 요리를 망쳤다고 언짢아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이구아나가 재료로 들어가는 건 좀 너무했어요. 아무래도 닭으로 대신해야 할까 봐요. 알피가 그러는데 뭐든 희귀한 것들은 대강 치킨이랑 비슷한 맛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싱가포르에서 악어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정말 어딘가 치킨과 생선의 중간 맛이었어요.
그런데.. Seriously, 이구아나라고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