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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Apr 19. 2020

과거 파리를 걷던 남자는 왜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까

<미드나잇 인 파리> 리뷰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본지 3주가 되었지만 그때는 글을 쓸 의욕 자체가 없어서 글을 미루어 두었다가 글을 쓴다.



길 펜더, 한 허무주의 문학가의 과거 사랑


길 펜더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1920년대 파리의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과거의 예술가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순수 청년이다. 길 펜더가 과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이유는 다각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한 개인이 과거에 대한 동경이 광적인 이유는 현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반증일 뿐이다. 첫번째로, 길 펜더는 할리우드의 잘 나가는 극본 작가이지만 마음 한 켠에 소설가의 꿈을 가지고 있다. 할리우드의 극본가는 돈을 잘 벌지만 예술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길 펜더는 현대의 모든 예술은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고 그것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지만, 현대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보다 예술적이기 보다는 대중성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즉, 길 펜더는 예술을 알아주지 않은 현대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로, 길 펜더는 이네즈라는 무지막지한 여자의 약혼자다. 언제나 길 펜더의 의견을 무시하고 단지 길 펜더가 극본가로 돈을 잘 벌기 때문에 그를 생각할 뿐이다.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길 펜더가 이네즈와 왜 약혼을 했는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길 펜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수동적으로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길 펜더 자신은 현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그냥 여자가 결혼하자고 하니까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즉, 길 펜더는 현실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 더러운 세상보다 예술을 사랑했던 1920년대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과거로 간 남자, 과거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재밌게 본 점은 과거의 예술가들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위대한 게츠비>를 집필한 피츠 제럴드, 그녀의 아내 젤다, 초현실주의의 달리가 나왔을 때 반가웠다. 나는 화려한 문학 작품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사실, 헤밍웨이 같은 딱딱한 문학은 싫어하는데 영화를 보고 헤밍웨이의 인간성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여하튼, 길 펜더는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면서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약혼자와는 완전히 다른 예술의 화신이었다. 길 펜더와 말도 잘 통하고, 예술에 대한 조회도 깊고, 팜므파탈적인 매력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1920년대의 세계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한다. 길 펜더는 현대와 1920년대를 사이를 시간 여행하며, 자신이 신처럼 생각하던, 피츠 제럴드, 헤밍웨이, 피카소, 고갱, 달리 등을 만나며 생각에 잠긴다.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이 예술가들은 한 시대의 획을 긋고 예술의 신처럼 느껴지지만 과거의 그들도 인간이었다. 피츠 제럴드는 예술을 위해 예술을 한 것이 아닌 단지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썼고, 피카소는 여자한테 차여서 찌질한 면모를 보인다. 달리는 초현실적인 예술을 창조했지만 현실에서는 4차원 같이 헛소리만 하는 인간이었다. 또한, 그들도 길 펜더와 같이 현실에 대해 불만족하며 과거의 벨 에포크를 동경한다. 과거를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길 펜더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다시 시간 여행을 하여, 길 펜더는 아드리아나와 벨 에포크 시대로 간다. 아드리아나는 길 펜더에게 벨 이포크 시대에 머물자고 제안하지만, 길 펜더는 현실을 택하고 아드리아나를 놓아두고 현실로 돌아간다.



세 명의 여자 가운데, 가브레일을 선택한 남자


길 펜더는 현실이 괴롭고 힘들지만 인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는 선택을 한다. 현실로부터 도망쳐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 펜더는 현대 파리에서 레코드를 팔던 가브리엘을 만난다. 가브리엘은 길 펜더와 이야기도 통하고 길 펜더를 이해해주려고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세 명의 여자가 나온다. 탐욕의 화신이며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는 이네즈, 매혹적이고 길 펜더를 이해하지만 과거만 생각하는 아드리아나,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며 길 펜더를 공감하는 가브리엘... 감독은 세 여성을 병치시키며 사랑에 대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네즈는 자신의 방법으로 사랑을 했지만 소통이 불가능했다. 즉,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서로 소통이 기반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불가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두번째로, 아드리아나는 길 펜더를 사랑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길 펜더를 선택하지 않았다. 즉, 서로에 대해 소통은 가능했지만, 자기자신을 바꾸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은 길 펜더와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을 했다.  공감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며, 상대방을 생각하는 힘이다. 실 펜더와 가브리엘이 파리의 비를 맞으며 걷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것은, 과거에 매료되어 허무주의에 빠졌던 남자가 현실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자신을 진정으로 공감하는 상대방을 만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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