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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성 Jul 04. 2020

당신은 사이코도 사랑할 수 있나요?

<사이코지만 괜찮아>

'괜찮은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에 홀로 서서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은 재밌는 공간이다. 정신병원은 광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며 동시에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주무대 또한 정신병원이다. 1화에서 문강태(김수현)가 탈주한 환자와 몸싸움을 버릴 때, 문강태는 소품으로 날아가게 되고 소품의 불이 켜지면서 '원더랜드'라는 간판의 불이 켜진다. 원더랜드는 루이스 케럴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이다. 원더랜드는 쐐기 벌레, 미친 모자장수, 체셔 고양이, 하트의 여왕과 같은 광인들이 사는 곳이다. 이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그 사이에 광기와 진리를 표현한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작가는 아마 원더랜드와 정신병원을 비슷한 공간으로 병치시켜 놓았을 것이다. 현대의학이 발달함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정신병은 세분화되어 이전 시대에 정신병이 아닌 것이 정신병이 되어 바렸다. 가령, 최근에 ADHD의 경우, 100년 전만해도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의 행태로 여겨졌겠지만, 지금은 병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신병원과 정신병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사용된다. 정신병원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을 칼같이 나누며, 사회의 통념에 맞지 않는 행동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신병자라고 간단하게 명명한다. 일상의 삶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독특한 행동을 하거나, 술을 먹고 약간의 기행을 펼치면 우리는 이렇게 외쳐 버린다. '저새끼는 또라이여' 혹은 '얘는 사이코 기질이 있어'라고 말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원이다. 모두가 사회가 원하는 행동을 하게 자신을 검열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사회가 바라는 상에서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홀로 검열을 한다. '나는 너무 뚱뚱한거 아닌가', '나는 주말에 놀기보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하는 것 아닌가'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을 24시간 자기검열을 한다. 사회는 우리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네가 내가 원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너는 정신병자가 될 것이야, 그러니까, 너는 나의 규칙에 따라야해'라고 말이다.



고문영의 동화와 나의 아픈 과거를 대면한다는 것은


드라마의 첫화는 고문영(서예지)의 동화로 시작된다. 고문영의 드라마는 기존의 동화와 달리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현실적이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디즈니에서 만든 동화들은 모두 해피앤딩이며 밝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동화들의 원작은 매우 잔혹하다. 피터팬은 나이가 든 아이들을 죽였으며, 신데렐라의 언니들은 신데렐라의 구두를 신기 위해 도끼로 자신의 발로 잘라냈고, 백설공주의 사악한 여왕은 불에 달궈진 쇠구두를 신었다. 이처럼, 초기의 동화는 매우 현실적이며 잔혹했다. 그런데, 최근의 동화들은 현실 속에서 밝은 것만을 보여주며, 희망적인 이야기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현대의 동화들 또한 사회에 적합한 인재상을 위해 교훈적인 이야기만을 담아낼 뿐이다. 사회에 대한 모순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며, 사회에 순응적인 삶을 내면에 심어주며, 밝은 교훈적인 주제에서 인간은 고민을 못하게 만든다. 고문영의 동화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동화로 보여준다. 고문영의 동화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이 서로 대화하는 장치다. 끊임없는 경쟁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고민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공부와 일이 고된데,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피곤한 일이며, 더 나아가 돈을 버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의 아픈 내 모습과 대화하는 것은 적어도 나를 인간답게 만들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진실된 고민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못난 과거를 미화시키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자신의 밝은 모습만을 긍정하는 인간의 내면은 텅비어있을 뿐이다. 자신의 밝은 모습만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인생의 걸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주 좀비 같은 삶이다. 자신의 과거를 대면하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성가신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긍정적이던, 부정적인 과거를 조우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고문영은 기행을 펼치는 사람이지만, 드라마 내에서 제일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에 비해 떨어지지만, 솔직하고, 타인의 아픔을 오히려 이성적으로 꿰뚫어 보는 탁월함까지 보인다. 사실, 드라마 내에서 과연 고문영이 사이코인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 많긴 하다. 고문영은 사이코가 아니라 공강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떨어질 뿐이다.



사이코와 정신병동 보호사의 사랑


고문영과 문강태는 모두 아픔을 가진 존재다. 고문영은 과거에 부모에게 수단으로 여겨지고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고문영을 무작정 광인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고문영은 이성적이며,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냉정한 그녀의 눈으로 상대방의 괴로움을 꿰뚫어보기도 하며, 상대방의 사회적 짐을 덜어주어 자유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반대로 정신병동 보호사인 문강태는 선하고, 바르지만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문강태가 어린시절 어머니는 정신지체인 문강태의 형을 더 사랑했고, 끊임없이 문강태에게 형을 돌봐줄 것을 강요했다. 문강태는 책임감을 가지고 형을 돌보지만 그 내면에는 어머니에게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과 형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만 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고문영은 사랑하는 방법과 공감능력이 떨어지지만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면, 문강태는 타인을 사랑하고 이타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전혀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이처럼, 둘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고문영과 문강태는 모두 하자가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드라마 초반부에 고문영과 문강태는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계속 갈등을 한다. 드라마가 당연히 과장이 된 면은 없지 않으나, 누군가와 사랑을 한다는 것은 갈등과 합의의 연속이다. 당연히, 모두 다른 삶을 살았는데, 상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는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 갈등을 서로 소통하고 고치며 합의한다면, 사랑은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는 서로의 차이를 인지하고, 이런 간극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과정이다. 사실, 너무 무미건조하게 썼지만 사랑은 커뮤니케이션적으로 해석한 것을 조금 더 넘어서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며, 종국에는 서로를 존재로 존중하는 자세가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말해주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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