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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Feb 03. 2022

아버지의 빨간맛

[아버지의 레시피] 여섯 번째 이야기

개고기를 뜯고 씹고 맛보던 사람들이 여름과 함께 떠나면, 지독한 빚쟁이 같은 쓸쓸함이 청계산 보신탕집 ‘오작교’ 문을 두드렸다. 살아남은 개마저 괜히 짠해 보이는 풍경, 가을날의 우리집이 딱 그랬다. 


유별난 풍경 아니다. 여름 휴가철이 끝나면 해수욕장 구멍가게 처마에 걸린 돌고래 튜브가 마른 굴비처럼 보이듯, 제철이 있는 모든 것들은 그때가 지나면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여름 뒤에 찾아오는 지루한 고독은 보신탕집 사장의 운명이건만, 아버지는 그걸 잘 견디지 못했다. 사랑을 택해 옆집 총각과 청계산을 떠난 엄마에 이어 새엄마와도 헤어지자, 아버지의 가을 방황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우고, 도시(오늘날 서울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 인근) 화투판에서 까만 밤을 하얗게 보냈다. 며칠간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없는 집, 여름을 견뎌낸 개만 컹컹 짖어대는 가을날의 보신탕집이 무시할 리 없었다. 몇 번의 텅빈 가을을 보낸 끝에 우리집은 몰락했다. 두 아내에 이어 아버지는 이제 집을 잃을 차례였다. 


내 의식이 기억하는 첫 번째 공간 오작교. 누가 가르칠 수도, 어디 가서 배울 수도 없어, 사교육으로도 만들 수 없는 내 성정의 한 토막이 생성된 유년의 집을 나도 떠나야 했다. 아버지처럼 이마가 넓은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던 1985년,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오작교와 가까운 아랫마을 한가운데, ‘회색 공구리’로 사면을 두른 부엌 딸린 방 한 칸짜리 집이 아버지와 나의 새 보금자리였다. 나는 이 집에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개막식을 TV로 봤다.


비쩍 마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800m, 1500m, 3000m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차지해 전 국민의 가슴을 적시던 시절. 그 임춘애가 가난 탓에 라면만 먹고 훈련했다는 출처 불분명의 뉴스가 회자되며 ‘헝그리 정신’ 신화가 전국 방방곡곡 뿌리를 내리던 그때, 아버지와 나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보신탕집에서 밀려난 아버지는 직업이 없었고, 화투판의 타짜로 거듭나지도 못했다. 나는 아직 어려서 아시안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따올 수도 없었다. 우린 임춘애가 아니어서 라면만 먹고 살 수도 없었다.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중반, 산업화에 따른 고도성장기였다. 중산층 사람들이 자기 차에 술과 고기와 불판을 싣고, 산-들-바다에서 부어라 마셔라 여흥을 즐기던 시절. 한국인들은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그 덕에 오작교도 한시절 뜨거웠다. 그 육식과 흥청망청의 시대가 전직 보신탕집 오너였던 아버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줬다. 


그 해 여름 어느날,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청계산 계곡 상류로 올라갔다. 사찰 청계사 인근에서 멈춘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며 저 아래 냇가에서 노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해가 기울고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자 아버지는 누런 쌀포대를 내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빈병을 주을 테니까, 넌 알루미늄 캔을 담아.”


아버지와 나는 냇가로 내려가 피서객이 버리고 간 빈병과 캔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쌀포대는 부피가 큰 병으로 금방 찼다. 내가 든 포대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캔은 가볍고 부피가 작았으니까. 



그렇게 계곡 오르내기를 몇 차례, 빈병과 알류미늄 캔이 몇 포대 쌓이면 아버지는 폐품수집상을 불렀다. 트럭을 몰고 우리집을 찾은 수집상 아저씨는 빈 병을 맥주-소주-음료수 등으로 분류한 뒤 갯수 당 값을 매겨 돈을 줬다. 캔은 쌀포대 그대로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재서 돈을 치렀다. 


빈병과 캔 수집,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가계를 꾸렸다. 부끄럽거나 창피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때 이웃들은 대체로 고르게 가난했고, 그 평평한 곤궁함이 젖은 옷을 다려주는 다리미처럼 내 가슴에서 수치심을 증발시켰지 싶다. 


계곡을 다니며 빈병과 캔을 모아 팔기를 몇 번 쯤 반복했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말했다. 


“아버지, 캔 가져가는 아저씨 무게 잴 때, 쌀포대 내용물 확인도 안 하는데… 캔 안에 흙을 채우면 어떨까? 무게 많이 나가서 돈 많이 벌 수 있잖아.”


아버지는 당신의 이마보다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른손으로 벗겨진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슬쩍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근데… 그게 끝이었다. 아버지는 내 속임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과 똑같이 오직 찌그러진 캔만 쌀포대에 담아 저울에 올렸다.  


아버지의 소심한(?) 선택은 아들 앞에서 사기를 칠 수 없다는 교육적 명분, 스스로 거짓된 삶을 살 수 없다는 숭고한 뜻과는 상관이 없었을 거다. 그저 여기서 흙으로 장난을 쳤다가는 폐품팔이 세계에서도 추방될 수 있다는 본능적 결단이었지 싶다. 


8.15 광복절이 다가오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질 무렵, 아버지의 포대는 빈병으로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내 몫의 포대 역시 찌그러진 캔마냥 쪼그러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보신탕 가게처럼, 우리의 폐품 수집도 제철이 있다는 걸 말이다. 계곡의 피서객이 줄어들수록 아버지의 지갑도 얇아졌다. 


계곡에서 빈병 줍는 것도 쉽지 않아 이것도 이젠 끝이구나 싶던 어느날, 아버지는 소고기가 잔득 들어간 찌개를 끓여 내게 밥상을 차려줬다. 한여름 함께 고생한 아들을 위한 일종의 선물이었다. 감자, 호박, 대파, 소고기를 넣고 빨갛게 만든 찌개였는데 국물 표면에는 숯가루 같은 검은 알갱이 몇 개가 동동 떠 있었다. 표면과 끄트머리가 조금 탄 소고기도 보였다. 


그 검은 흔적이 아니어도 아버지가 이 찌개를 어떻게 끓였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계곡 어디쯤에서, 아버지는 피서객이 구워 먹고 남기고 간 소고기를 봉지에 담았다. 나는 못 본 척 했고, 아버지가 부엌에서 요리할 때도 식재료의 출처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나는 새빨간 소고기 찌개에 숟가락을 푹 담갔다. 소고기와 국물을 함께 떠서 입에 넣고 씹어 먹었다. 살짝 탄 고기에서는 불맛이 났다. 역시 아버지 음식은 매웠다. 아버지 역시 그랬는지 넓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찌개는 맛있었다. 불맛 나는 소고기는 더 맛있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은 건, 내가 속깊은 아이라거나 아버지를 배려해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배가 고팠고, 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게 전부다. 


1986년 여름 끝무렵의 그 불맛 나는 소고기는 내 ‘인생 고기’다. 혀가 기억하는 맛있는 추억이다. 그날의 식사는 내게 단순한 진리를 새삼 알려줬다. 살고 싶으면 먹어야 한다는 것,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여름과 함께 아버지와 나의 빈병 줍기도 끝났다. 이젠 어떻게 먹고 사나 싶었지만, 우린 굶어 죽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작교를 인수한 사람 밑에서 일을 시작했다. 전직 오작교 오너가, 이젠 오작교의 노동자가 된 것이다. 


먹고 산다는 게, 살아가는 일이… 참 그럴 때가 있다. 


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버지의 결단에 어떤 숭고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덕에 내가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말이다.


밥하기 귀찮고, 사먹는 것도 싫고, 뭔가 든든한 걸 간단히 먹고 싶을 때 소고기 한 덩이 사다가 구워 먹곤 한다. 수없이 구워 먹고, 일부터 조금 태워봐도 1986년 그 여름의 소고기만큼 맛있지가 않다.


이게 다 그때 만큼 배고프지가 않아서야, 라고 퉁 치려는 순간 ‘아버지의 레시피’가 떠오른다. 다음엔 아버지 방식대로 한 번 끓여봐야겠다. 


소고기를 살짝 탈 정도로 구운 다음, 고추장 푼 물에 투척. 감자와 호박, 대파,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팔팔 끓이면, 아버지가 만든 것처럼 맛있는 찌개가 완성될지 모른다. 어쩌면 그 시절의 끝내주는 맛은 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아버지가 요리를 잘한 결과일 수도 있다. 


[글쓴이 박상규는 진실탐사그룹 셜록 대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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