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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규 Sep 05. 2024

짐볼에서 머리 추락.. 강사마저 달라졌다

필라테스 이야기 - 2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 새벽 공기가 축축했다. 몸은 끈적였지만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어제와 달랐다. 습한 공기마저 상쾌했다.


돈 내고 무언가를 배우는 게 얼마 만인가. 남들 자는 이른 시각에 운동복 입고 실내 체육관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축지법을 쓰는 것마냥 가벼웠다. 장마 초입이던 7월 2일, 그렇게 중년의 필라테스가 시작됐다.


GX(group exercise)실로 들어가자 나를 필라테스 세계로 이끈 ‘23층 남자’가 요가 매트 위에서 몸을 풀며 씩 웃었다. 그는 턱으로 GX실 정면 왼쪽 벽을 가리켰다. 둥글게 돌돌 말린 요가 매트가 보였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요가 매트를 가져와 발밑에 펼쳤다.


여유로운 미소부터 부드러운 스트레칭, 여기에 신입생을 안내하는 친절한 태도까지, 23층의 남자는 필라테스계의 프로였다. GX실은 나처럼 40대거나 곧 마흔을 앞둔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남성 열 명으로 금방 채워졌다. 누구는 스트레칭을 했고, 누구는 들어오자마자 매트 위에 벌러덩 누웠다. 오전 6시, 다들 피곤해 보였다.


“자, 일어나시고요. 팔 벌려 뛰기 10회 하겠습니다.”


여자 목소리가 실내를 흔들자 다들 일어나 제자리에서 일제히 팔 벌려 뛰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열. 잘하셨어요.”


여자는 실내에 음악을 틀고, 구호를 붙이며 뒤에서부터 걸어와 우리 앞에 장군처럼 섰다. 필라테스 강사님이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끼리 커뮤니티센터에서 하는 운동이어서 신입생 환영회까지는 아니어도 자기소개 시간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장군님은 바로 직진했다.


“자, 손 모아서 엄지손가락으로 지긋이 턱을 밀어 올립니다. 혀는 입 천장에 붙이시구요.”


난 이웃집 남자들을 곁눈질 하며 눈치껏 따라했다. 첫 수업의 첫 번째 도구는 폼롤러. 목봉 체조라도 하듯이 폼롤러를 번쩍 들어 올리며 스쿼트, 허리 끝에 깔고 누워서 다리 올리기, 세로로 세워서 런지 자세….


강사님은 폼롤러 하나로 별별 동작을 다 구현했다. 우리 중년 남자들은 강사님을 보면서, 때로는 서로를 곁눈질 하면서, 자세가 맞든 틀리든, 다리라 올라가든 말든, 어쨌든 시키는 동작을 따라 했다.


30평 남짓의 GX실이 금방 고통의 한숨과 인내의 거친 숨소리로 채워졌다. 꾀병같은 비명, 민망한 신음소리 등 유독 힘겨워 하는 소리는 한쪽에서 집중적으로 들려왔다. 쳐다보면 괜히 눈치 주는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동작에 집중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특정 남자가 토하는 고통의 신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저러다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고개 돌려 바라봤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여러 면에서 프로다웠던, 필라테스 전도사 23층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딸기처럼 붉어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몸을 쥐어 짜고 있었다.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아저씨는 수강생 중에서 가장 연장자로 보였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운동했다. 존경스러웠다.


뻣뻣한 몸을 푸는 동작은 아프고 힘들었지만, 첫날 운동은 솔직히 어렵지 않았다. 수년째 이어 온 아침 운동과 스쿼트, 털걸이를 한 덕이라 여겼다. 사실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사고는 정확히 이틀 뒤, 7월 4일 목요일에 터졌다.


내 생애 두 번째 필라테스 수업, 이번 도구는 말랑말랑한 짐볼이었다.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은 살면서 수없이 다뤄봤지만 짐볼은 처음었다.  

짐볼을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펴는 스쿼트는 적절하게 소화했다. 강사는 짐볼 위에 앉는 시범을 보이며 따라하도록 지시했다. 말랑한 짐볼 위에 앉자 엉덩이가 닿은 위쪽이 푹 꺼졌다.


푹신한 느낌은 좋았지만, 그만큼 무기중심과 균형 잡는 게 어려웠다. 난 균형을 잡으려 두 다리에 힘을 줬다. 그래도 짐볼이 좌우로 흔들렸다. 강사는 소파에 앉은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이까이꺼 뭐, 엉덩이를 뒤로 좀 빼면 나도 흔들림 없는 편안한 자세가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엉둥이를 살짝 뒤로 옮기는 순간, 강사와 눈이 마주쳤다. 강사는 “그게 아니구요…” 라는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그 말을 끝내기엔 너무 늦었다. 짐볼 위의 내 몸은 뒤로 발라당 넘어갔다.


'꽝!'


내 머리통이 마룻바닥과 충돌하는 소리가 GX실을 흔들었다. 눈앞에서 번개가 쳤다. 강사의 비명소리, 23층 아저씨의 짧은 탄식,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이웃집 남자들이 놀라는 웅성거리는 소리…. 이 모든 걸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그랬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사가 내 빡빡머리 머리통을 두 손에 쥐고 “괜찮아요?”라고 반복해 묻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전쟁을 지휘하는 여러 장군이 다친 병사를 위로하는, 익숙한 영화 장면 같았다.


“괜찮습니다.”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일단 쪽팔렸다. 너무너무 쪽팔렸다.


“다친 덴 없어요?”


장군님 같은 강사님은 여전히 내 머리통을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어디 상처난 데는 없는지, 부어오르지는 않는지, 어쨌든 나의 대머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정말이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야 했다. 어지러워서 말이 헛나온 걸 수도 있다. 머리통에 외상이 없고, 눈빛이 돌아온 걸 확인한 강사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한동안 날 가엾게 바라봤다.


“가민히 앉아서 쉬는 게 어때요?”


나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 제정신을 못 차려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강사는 다시 구호를 붙이고, 동작 시범을 보이며, 중년 남성들을 진두지휘했다. 남자들은 다시 따라했다.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날 필라테스 1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명 ‘현타’가 찾아왔다. 나의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 스스로의 한계와 위치를 적나라하게 알게 되어 저절로 겸손해지는 시간 말이다.


온갖 센 척은 다 하지만, 고작(?) 그 말랑한 짐볼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딱딱하고, 균형감각 없는 중년의 몸이라니. 이래저래 슬퍼졌다.


나의 몸과 마음, 실력과 능력 같은 걸 객관적으로 인식했던 첫날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1991년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유난히 운동장이 질척거렸던 그날, 나는 ‘세상에 압도당했다’라는 게 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는, 내가 키가 작은 남자라는 걸 몰랐다.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수치여서 당연히 알 법도 했지만, ‘작다’라는 감정이나 인식이 내겐 없었다.


초등학교는 한 반에 25명씩 두 개 반이 전부인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읍내라 불릴 법한 곳으로 갔는데, 역시 50명씩 네 개반이 전부였다. 남녀 공학이어서 남자는 많아야 100명이었다. 나의 세계는 좁고 작았고, 친구들 체격 역시 그런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물론 큰 아이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친구들 무리 중 일부에 불과했다.


큰 도시의 고등학교에 들어간 첫 날, 그 질척거리는 운동장에서 나는 거인들에 둘러쌓인 것만 같았다. ‘도시 애들은 원래 이렇게 발육 상태가 좋은 건가?’ 싶을 정도로 친구들의 키와 덩치가 컸다.


그날 이후 충격의 나날이 이어졌다. 도시 애들은 공부를 잘 해도 너무 잘했다. 특히 삼성전자 임원 부모를 둔 친구들이 그랬다. (고교가 삼성전자 옆에 있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운동까지 잘하는 걸, 나는 고등학교에서 처음 봤다. 공부-피지컬-운동신경, 이걸 다 가졌다니. 뭔가 반칙 같았다. 읍내 중학교 시절까진 축구도, 농구도, 달리기도 잘하는 축이었는데 고교에선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게 아니라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줄 알았다.


내가 작고, 공부 못하고, 운동도 그저 그런 수준이란 ‘팩트’를 동시에 알아버렸으니, 정말이지 익숙한 나의 세계가 붕괴되는 듯했다. 떠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던, 그 압도적인 교교 시절. 어쨌든 그 시절을 통과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고, 월급을 받고…. 내가 진입하는 세상이 넓고 크고 깊어질수록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하는 ‘자기 객관화의 시간’은 청구서처럼 어김없이 날아왔다. 외면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시간. 성장하려면 어쨌든 견디고, 저쨌든 넘어서야만 했던 거대한 장벽들.


이쯤 살았으니 그 모진 고개 이젠 다 넘었겠지 했는데, 짐볼에서 추락해 머리통 바닥에 박고 나니 아직 갈길이 멀구나 싶다. 균형감각 없는 뻣뻣한 몸에 대한 자각. 역시 나란 놈은 가끔씩 충격과 공포를 겪어야만 잠시라도 겸손해진다.


이젠 ‘필라테스 그까이꺼 뭐…’ 하는 식의 건방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부드럽고 말랑한 짐볼에 편안히 앉기, 나는 이 거대한 장벽을 넘어야만 한다.


이렇게 결심했건만, 그날 이후 강사는 더는 짐볼 수업을 하지 않는다. 내 머리통을 누구보다 더 걱정하는 것 같다. 그날, 나보다 큰 충격을 받은 건 강사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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