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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봉지를 남긴 손님과 깊은 밤

by 박상규

냄새나는 양말을 벗어 놓고 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탁기에 던져 넣으면 끝이니 말이다. 손님은 양말 대신 고구마순 한 봉지를 남겨 놓고 떠났다. 고구마라면 찌거나 구워서 간단히 해치울 텐데, 하필이면 고구마순이라니.


나물로 무치든 김치로 만들든, 고구마순은 얼마나 귀찮은 식재료인가. 한입 먹으려면 껍질을 까고-다듬고-데치고-무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남이 해준 것만 먹었지, 내 손으로 굳이 만들지 않았다.


‘동네 엄니들에게 드릴까?’


잠시 이런 생각을 했으나, 금방 접었다. 지리산 피아골에서 고구마순은 잡초처럼 흔하다. 각자의 텃밭에도 차고 넘치는데, 이걸 선물로 드리면 엄니들은 필시 이런 고민에 빠지고 만다.


“저 놈이 나한테 무슨 안 좋은 감정이 있나? 왜 나한테 이걸….”


그냥 버릴까도 잠시 고민했으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버스로 세 시간 넘게 달려온 손님은 구례에 도착하자마자 고무마순부터 구매했다. 구례군은 고구마 특화단지가 아니다. 이 동네 고구마순이 유별나게 맛있을 리도 없다.


손님은 그저 구례 읍내를 걷다가 길거리에 앉아 고구마순 파는 할머니를 봤고, 그 순간 고구마순 김치를 좋아하는 자신의 식습관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키다 끝내 지갑까지 열고 말았다.


대개의 사람은 일정을 마치고 여행지를 떠날 때 그 동네 식재료를 산다. 1박2일 여행지 시골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냉장 보관을 요하는 식재료를 구매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드문 사람이 셜록클럽 에세이 쓰기 모임 ‘창밖은 여름’ 멤버였고, 쫑파티 MT 구성원으로 피아골 우리집에 왔다. 구례 읍내로 픽업을 나갔을 때 그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움켜 쥐고 내 차에 올랐다. 그 고구마순을 지금 내가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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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나를 고민에 빠트린 고구마순의 전사(前史)다. 이런 내력과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군침을 아는데, 이걸 어떻게 버리나.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도착하자마자 충동 구매를 했을까.


나는 거실 바닥에 주저 앉아 고구마순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까도 까도 줄지 않는 수북한 양이었다. 작업을 중단하고 고구마순을 사진 찍어 MT 멤버 톡방에 올렸다. 검은 봉지의 드문 사람이 물었다.


“껍질 까져 있는 거 아닌가요?”


어? 지금 내가 헛짓을 하는 건가? 작업 전에 분명 엄마에게 전화로 물었었다. 엄마는 ‘닥치고 까’라고 했다. 물론 엄마는 고구마순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내가 톡방에 적었다.


“전문가의 감정 받아봅시다.”


이때부터 톡방에서는 ‘깠냐 - 안 깠냐’ 고구마순 대논쟁이 벌어졌다. 드문 사람은 고구마순의 전사(前史)에 디테일을 더했다.


“안 깐 건가요? 안 깐 건 보라색 껍질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할머니한테 ‘이거 까느라 정말 고생하셨겠어요’라고 까지 했는데요. ㅋㅋㅋㅋ”


‘까’가 무려 네 번 등장하는 메시지. 드문 사람은 디테일에 깨알까지 더했다.


“미치겄네요. 저거 까기 싫어서 안 사먹는데. ㅋㅋㅋ”


지가 까기 싫어서 나한테 던지고 간 건가?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 무렵, 다른 멤버들의 참전이 이어졌다.


“저걸 언제 다 까실런지. 어제 비오는 거 보면서 얘기할 때 함께 깠으면 금방 해결했을 텐데 아쉽네요. 모든 것이 운명일지니. 하나하나 고구마 줄기를 까는 기자님 모습이 상상됩니다. 이왕 하시는거 수행하는 맘으로 하셔요. ㅎㅎㅎ^^”


고구마순 전문가를 자처하는 멤버도 논쟁에 들어왔다.


“비주얼 보니 깐 거 맞습니다. 할매들이 안 깐 걸 깠다고 할 리 없음. 깐 거라서 만 원에 판 거임.”


깠다, 깠냐, 까기, 까실런지, 깠으면, 까는, 깠다고, 깐 걸…. 줄줄이 어이어지는 어감 좋지 않은 이 된 발음 ‘까’의 향연이라니.


고구마순 전문가 멤버는 정연한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안 깐 껍질은 이렇게 나오지 않음. 연두색 껍질도 있지만 저 건 깐 걸 또 깠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비주얼임. 그래서 껍질이 실처럼 벗겨지는 거임.”


나 지금 깐 걸 또 까고 있는 걸까?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동네 엄니를 찾아가 고구마순을 들이밀며 물었다.


“엄니, 이거 깐 겁니까? 안 깐 겁니까?”


엄니는 고구마순을 슥 훑어봤다.


“반반이여.”


고구마순이 치킨도 아닌데 반반이라니. 엄니는 멍한 나의 눈을 보며 ‘까’의 향연에 참전했다.


“까긴 깐 거여…. 근데 좀 더 까. 덜 까진 게 있으까. 깨끗하게 까야 부드럽지. 덜 까면 질겨 못 묵어.”


이렇게 고구마순 대논쟁 종결. 나는 다시 가만히 앉아 고구마순을 다듬기 시작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기름에 들들 볶아 나물로 무치든 고춧가루 뿌려 김치로 만들든, 두 음식 모두 시도한 적은 없으나 뭐든 끝을 봐야 했다.


내 마음은 김치로 기울었다. 검은 봉지의 드문 사람 말대로, 김치가 고구마순의 운명이었다. 시작이 어렵지 끝은 어렵지 않은 세상이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온갖 김치 레시피는 물론 직접 시연까지 나온다. 시작만 한다면 어떻게든 끝을 보게 된다.


내 피아골 별장엔 없는 게 많다. 차에 시동을 걸어 읍내로 달려 고춧가루, 액젓, 생강, 쪽파, 새우젓을 구매해 싣고 돌아왔다. 왕복 1시간 거리다. 빨간 건고추를 못 산 게 마음에 걸렸다.


먼저 고구마순을 살짝 데쳐 숨을 죽이고 물기를 뺐다. 엄마와 동네 엄니들은 입을 모아 밀가루로 풀을 쒀 양념을 버무리라고 했다. 내겐 밀가루가 없으니 햇반의 흰밥을 으깨 이용했다. 유튜브의 여러 음식 크리에이터는 생강, 마늘, 새우젓을 함께 믹서기에 넣고 ‘조사버리라’고 했느나, 그런 도구는 내게 없다.


칼과 도마로 모두 조샀다. 설탕이나 매실청을 넣으라는 주문이 많았으나 내키지 않았다. 나는 대신 사과를 택했다. 마늘, 생강은 칼로 다져도 문제 없으나 사과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도 열과 성을 다해 사과를 조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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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도마로 정리한 야채와 과일을 고춧가루, 액젓과 함께 숨 죽은 고구마순에 끼얹어 열심히 버무렸다. 반려견, 길고양이 만지듯이 때로는 부드럽게 말이다.


계획에 없고 예정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만들어낸 내 생애 첫 고구마순 김치. 맛을 보니, 세상에나 만상에나! 슴슴하고 아삭하고 시원했다.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반나절 숙성해 먹어보니 역시 맛이 좋았다. 음식이 뭐 별건가. 어차피 나 먹으려 만들었으니, 내 입에 맞으면 그만이지. 김치 완성 사진을 ‘1박2일 멤버 톡방’에 올리며 나는 이렇게 적었다.


“날 외롭고 쓸쓸하게 키워 스스로 (음식) 만들어 먹게 해주신 아버지에게 감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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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순을 남기고 떠난 검은 봉지의 드문 사람도 아니고, 지도 편달을 아끼지 않은 엄마와 동네 엄니도 아닌 이 세상에 없는 아버지부터 찾다니. 이걸 알면 내 주변의 여러 엄니들이 한 마디 하시겠지.


“아이고, 저 숭악한 놈. 깐 고구마순인지, 안 간 고구마순인지도 모르던 까막눈 가르쳐 김치 먹게 해줬더니 지 아버지부터 찾는 저 지랄을 떠네.”


사실인데 어쩌겠나. 김치를 만드는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길고 긴 유년의 밤을 떠올렸다. 그 터널을 통과하던 어느 밤에 허기진 꼬마는 부엌으로 가 뭐라도 꺼내 먹고 만들어 먹었다. 그 검은 밤이 검은 비닐 봉지에 가득 든 고구마순을 보고 덜컥 겁부터 먹지 않게 하고, 뭐라도 만들어 보라고 가르쳤지 싶다.


그렇게 나는 아삭한 고구마순 김치를 씹으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검은 밤으로 돌아갔다. 이 고구마순 김치를 먹이고 싶은 한 사람도 오래도록 생각했다.


손님이 냄새 나는 양말 대신 고구마순을 남기고 떠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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