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도와주세요!
알린 도와주세요!
피 칠갑이 된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은 딱 하나였다. 이진양 선생님, 알린 이 올란데즈(45)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다.
잠시 뒤, 25km 떨어진 읍내 번화가에서 택시 한 대가 출발했다. 험한 산길을 한참 달려 캄캄한 마을 어귀로 진입했다. 어느 집인지 헤맬 것도 없었다. 아이들 울음소리를 따라간 곳이 알린네 집이었다. 녹슨 양철 대문이 아무렇게나 열려 있었다.
"들어가 보니 뭐 난장판이지. 조무래기 셋에 갓난애까지 집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겨. 장정 둘은 널브러져 있고. 도와줄 사람이 어딨어. 알린 들쳐 업고 바로 나왔지."
충북 보은군 수리티재에서 남서쪽을 바라본 풍경. 겹겹이 쌓인 산을 몇 번이나 넘어야 알린이 사는 마을이 나온다. 사진에 보이는 고속도로가 아닌 굽이굽이 고갯길로 간다. 산 너머 골짜기마다 사람이 산다. ⓒ 김성인
택시기사는 알린을 업은 채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알린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택시기사의 푸른색 유니폼을 적셨다. 시동을 걸고 룸미러로 뒷좌석을 확인했다. 언제 탔는지 남편도 앉아 있었다. 술이 안 깨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골목을 후진으로 빠져나가 온 길을 되돌아 내달렸다. 읍내까지는 최소 40분, 험한 산길이라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굽이치는 고갯길을 전조등 하나에 의지해 나아갔다. 알린은 숨을 가삐 몰아쉬었다. 알린과 남편의 날숨에 피 냄새와 술 냄새가 섞였다. 손에서 자꾸만 땀이 나 택시기사는 핸들을 쥐었다 폈다 했다.
멀리 높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읍내에서 제일 큰 한양병원 응급실 앞에 차를 댔다. 기사에게 전화해 알린에게 가 달라고 부탁한 이진양 선생님이 먼저 와 있었다. 들것이 나와서 알린을 싣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자님, 한양병원 가 봐요. 거기 의사 선생님이 내 역사를 다 알아요."
한국에 온 후, 알린의 삶을 가장 잘 기억해주는 곳은 병원이다. 진료기록만 따라가도 15년의 자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알린의 휴대폰 사진첩엔 아이들과 찍은 기념사진보다 만약의 때를 대비한 '증거 사진'이 더 많다.
나, 알린 이 올란데즈
I, Arlene Endoc. Orlandez
알린 이 올란데즈 ⓒ 김성인
1973년, 필리핀 최남단 타굼(Tagum) 근교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 사는 충북 보은군 회남면 OO리보다도 더 작은 동네다. 시골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을 때 이미 알린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을까.
남동생이 세 살 되던 해 아빠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알린에겐 아버지 다른 동생들이 생겼다. 알린은 대학까지 다니는 동안 늘 돈을 벌었다. 큰딸의 월급은 나머지 동생들의 학비가 됐다.
2000년대 초반 필리핀엔 국제 소개팅 붐이 한창이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남자들이 단체로 선을 보러 왔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자꾸만 옆구리를 찔렀다. 외국인 남자랑 소개팅하자고, 원하는 나라 고를 수 있다고.
싫다고 몇 번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남동생이 진지하게 알린에게 말했다. 나이 들면 혼자 살기 외롭지 않겠느냐고. 누나가 결혼하면 좋겠다고.
2003년,
그때 나이 서른하나였다
국제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새댁들은 보통 열아홉, 스물이다. 혼기라는 게 있다면 알린은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였다. 그 간극엔 당시 일곱 살이었던 아들 조슈아(가명, 현재 21)가 있다.
"나 조금 속상한 이야기 있어요. 필리핀에 있을 때, 스물네 살 때 첫사랑 만났어. 그때 결혼까지 생각한 거야. 그래서 일년 반 같이 살아 봤어. 그랬더니 아기가 생기는 거야. 스물네 살이니까(웃음).
그런데 그 남자 유부남인 거 숨겼어요. 그래서 나 아기랑 짐 싸서 친정으로 갔어. 혼자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아기 우유값, 옷값 해야지 생각했어요. 내 인생 그때 너무 힘들었어."
2003년 3월 어느 날, 소개팅 장소에 들어섰다. 이때까지도 그냥 친구 따라 한 번 와 보자는 심산이었다. '미국 남자라면 영어를 쓸 테니 말은 통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하필 그 날, 미국인이 없었다. 대신 덩치만큼은 미국인 못지않은 한국인 남자가 이쪽, 그러니까 알린을 포함해 열다섯 명의 필리핀 여성들이 쭉 앉은 곳을 유심히 바라봤다. 알린은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린의 표현대로라면 '뚱뚱하고 나이도 있'었다. 1953년생, 알린과 딱 20년 차이다. 그때 이미 반세기를 산 중년 남자였다.
알린의 머릿속엔 딴생각이 가득했다. 돌아갈 타이밍만 쟀다. 남자는 달랐다. 노골적으로 알린만 쳐다봤다.
"아기 아빠 그때 이빨을 이케이케 (앙다무는 모양) 하고 나를 쳐다보는 거야. 그랬더니 회사가 남편 불러서 '그 여자 마음에 들어?' 물어봐요. 회사가 나한테도 '그 남자 어때요?'하고 물어. 나는 그냥 친구랑 온 거라고, 관심 없다고 했어. 근데 신랑이 어디 안 가. 나 마음에 든다고.
나 점점 내 인생 힘든 거 생각해. 아기 키우고, 동생들한테도 조금 돈 보내고.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나님? 하나님? 도와주세요, 생각만 하다가 점점 마음이 바뀌어요. '아, 그냥 할까?' 이렇게."
이를 앙 물며 추파를 던지는 그 남자에게 알린은 딱 한 가지를 물어봤다.
"이건 내 친구 얘긴데, 만약에 여자가 좋으면, 그 여자한테 아기 있어도 괜찮아요?"
"응, 상관없어.”
이 한마디에 마음이 열린 것 같다고 알린은 말한다. 물론 자기 얘기라는 건 털어놓지 않았다. 믿기 어렵지만, 친구 얘기처럼 슬쩍 물어본 게 진짜로 먹혔던 듯하다. 남편은 알린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혼 몇 년 뒤, 군에서 보내주는 친정방문사업 대상자로 선정돼 처음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공항에 마중나온 아들이 '맘마!'하고 부르는 걸 보고서야 눈치챘다고 한다.
고민할 시간이 딱 일주일 주어졌다. 30분도 안 주고 다음 날 바로 식을 올리는 다른 업체들에 비하면 긴 편이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업체에 전하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각종 서류 처리와 비자 발급 등을 업체에서 착착 진행했다.
한 달 후,
알린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인천공항에 내렸다. 4월 23일, 봄이 한창이었지만 열대지방에서 나고 자란 알린으로서는 처음 겪는 추위였다. 버스를 타고 또 몇 시간을 이동했다. 창밖으로 초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알린은 '저런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서 알린의 기대는 현실이 됐다. 대전 OOOO 아파트, 그녀는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방 세 개에 널찍한 거실까지 갖춘 아파트였다. 그녀는 집도,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번화한 시내의 경치도 전부 다 마음에 들었다. 시누이 식구가 같이 살았지만, 한국도 필리핀처럼 대가족이 모여 사는구나 짐작할 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딱 한 달 후, 남편이 알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
"신랑 갑자기 '가자!' 그래서 나 '어디? 여기 집 아니야?' 했더니 '아니, 이 집은 누나 집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회남면을 왔어. 여기 우리 회남면 2003년도에 처음 왔을 때, 포장도 안 됐어요 그 동네. 그리고 버스도 덜컹덜컹해. 길이 나쁘니까, 먼지도 많고. '나는 여기 왜 왔지?' 이 생각 했어요.
그래도 나는 우리나라(필리핀) 가난하니까, 이해해. '괜찮아. 괜찮아. 생각했어."
가짜 집 소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남편이 말한 '우리 집' 가는 길은 한국에서 사는 한 달 동안 본 풍경과는 아주 달랐다. 기다란 호수를 낀 산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을 알았다면 그때 써먹었을 거다. 비포장 산길을 달려 겨우 도착한 곳은 필리핀 고향 마을과 비슷한 크기의 시골 마을이었다.
남편을 따라 들어간 집은 대전 아파트와는 정반대였다. 작은 마당 한편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에서 지린내가 올라왔다. 집 안엔 작은 거실을 둘러싸고 삼면으로 비좁은 방이 세 개 들어차 있었고, 욕실은 꿈도 못 꿨다.
머리가 다 센 노부인과 중년 남자 둘의 눈이 알린에게 꽂혔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시동생 둘은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늙은 엄마와 장가 못 간 다 큰 아들 셋이 함께 사는 집이었다.
둘째 시동생은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오른쪽 반신이 거의 마비됐고 말을 할 줄 몰랐다. 어릴 적 할머니가 약을 잘못 먹여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시동생을 처음 만난 그 날부터 6년 동안 알린은 아픈 시동생을 수발들었다.
과거 국제결혼에서는
거짓말이 빈번했다
2000년대 초반에 국제결혼 중개업체를 통한 혼인에서, 결혼 당사자들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또 거짓말도 빈번했다. 기자가 인터뷰한 결혼이주여성 다섯 중 둘은 남편의 정신병력을 모른 채로 혼인했다. 시부모 부양 여부와 남편의 전과 기록 등 감추는 종류도 다양했다.
병수발은
차라리 쉬웠다
진짜 문제는 남편과 바로 아래 시동생이었다. 형제는 날마다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만큼 싸웠다. 한국말을 몰랐을 때도 형제가 뱉은 말이 욕이라는 걸 알았다. 시어머니도 형제를 어쩌지 못했다. 그녀 또한 알코올중독자였으니까.
그녀는 형제의 싸움을 말리다가 맞고, 숨는다고 맞고, 울어서 맞았다.
술이 문제였다. 그놈의 술이, 알린이 마신 것도 아닌 그놈의 술이 알린의 삶을 멋대로 흔들었다. 집안에 물건이 날아다니는 건 예사요, 욕설에 폭력이 더해졌다. 점점 심해졌다고 할 수도 없다. 2003년에도 그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막내아들이 태어난 그날도 남편은 술을 마셨다. 알린의 큰딸 진아(가명, 현재 15)가 그걸 기억한다. 알린과 아이들이 십수 년간 살며 터득한 방법은 외면이다.
"남편 불러도 애들 안 가요. 우리 큰딸 진아도 안 가, 수아(가명, 현재 14, 둘째 딸)도 안 가. 순택 (가명, 현재 13, 셋째 아들)이도 아빠 무시해. 그런데 우리 순호(가명, 현재 10, 넷째 아들)는 착해. 착해서 아빠가 부르면 가는 거야. 새벽에 자다가도 가요. 그래서 우리 막내 학교 가면 자꾸 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선생님, 이해해 주세요' 이렇게."
남편의 폭력에 처음부터 무기력했던 건 아니다. 이웃집에 달려갔고, 경찰에 신고도 했다. 경찰이 출동하면 옆집 아저씨가 사정을 설명했다. 그 집 내 친구넨데, 그냥 부부싸움이라고, 인제 다 괜찮다고 했다. 그땐 그랬다. 가정폭력은 집안에서 해결할 일이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 여기 와 본 사람들은 "뭔 일이 나도 경찰이 오기 전에 상황 다 끝나겠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옆집 아저씨에 의해 '단순 부부싸움'으로 판정된 그날 이후 알린은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다시 남편을 말리고, 때리면 숨고, 맞으면 울었다. 지나고 보니 그걸 '참고 산다'고 하더란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도 전부 '참고 살아야지 별 수 있겠냐'고 했다. 아이들 생각하라고.
그날도 참았다면
괜찮게 넘어갔을까?
알린은 그날 평소보다 조금 늦도록 밭에 있었다. 남편과 시동생은 낮부터 보이지 않았다. 속에서 욕이 부글부글 끓었다. 철 지난 팝송을 목청 높여 부르며 참깨를 털었다. 저녁밥을 조금 늦게 짓는 것이 그녀의 소심한 복수였다.
해가 다 져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언제부터 마셨는지 형제는 한창 다투는 중이었다. 알린의 네 아이들은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심장이 쿵쿵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이지만 알린은 좀체 적응할 수 없었다. 비좁은 방안에 알린이 숨을 곳은 없었다. 대신 품에 네 아이를 감싸 숨겼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평소같은 형제간 주먹다짐이 아님을 직감했다. 알린은 온몸을 덜덜 떨며 돌아보았다. 시동생이 긴 나무막대를 들고 있었다. 남편 죽으라고 그걸 휘둘러 댔다. 알린은 남편 앞을 막아섰지만, 막대를 막지는 못했다.
"아이들 다 봤어요. 여기 내 이마에서 피가 분수처럼 나오는 거를요. 근데 우리 남편, 시동생 기억 못해. 술 마셔서, 다 몰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자꾸만 아득해졌다. 시어머니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한창 싸우던 남편과 시동생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그즈음 둘째 시동생은 거의 방에 누워서 생활했다. 막내아들은 3개월 된 갓난아기였다.
그런데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당시 여섯 살이던 큰딸, 진아다.
"엄마랑 다 같은 방에 있었어요. 근데 삼촌은 취했고, 엄마가 다 했어요. 나중에 뭐 해놔야 된다면서 사진 찍으라 하고, 저희는 울면서 카메라로 사진 찍고."
그때 집안엔 알린 말고 네 명의 어른이 더 있었다. 그들 중 도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도 네 명이었다. 여섯 살, 다섯 살, 네 살, 그리고 6개월. 연년생 삼 남매가 꺼이꺼이 울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 피범벅이 된 엄마 모습을 찍었다.
"나 사진 다 찍어요. 그때 사진 지금은 없는데 옛날 핸드폰에 있어. 엄청 많이 찍었어. 왜냐면 이거 신고하고, 증거 필요하니까. 만약에 이혼하면 이거 필요해요. 지금 내 핸드폰에도 사진 많아."
응급조치를 하고 CT 사진을 찍었다. 이진양 선생님과 택시 기사가 알린 곁을 지켰다. 이진양 선생님이 새 옷을 가져와 알린을 갈아입혔다. 의사 소견을 듣는 일도, 수납이며 보험 처리도 두 사람이 척척해냈다.
취한 남편은 복도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검사 결과를 들고 나오는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 지금 당장 가라고 그랬다. 택시는 알린을 태워 대전 을지대학병원으로 곧바로 향했다. 깊은 밤은 끝날 줄을 몰랐다.
뇌에 혹이 보인다고 했다
시동생이 때려서 생긴 게 아니라, 원래 있던 종양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전에 쓰러진 적이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알린은 다른 걸 걱정했다.
"선생님, 우리 신랑 돈 없어요. 나 병원비 못 해요. 어떡해, 어떡해."
"처음에 나 거짓말했어요. 그냥 넘어졌다고. 왜냐면 병원비 없으니까. 그런데 김한규 교수님 계속 '알았어 알린, 괜찮아. 말해, 말해'하고 말하는 거야. 그래서 나 시동생 지팡이에 맞았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교수님 컴퓨터 따닥따닥하고 뭐 하는 거야. '우리 불쌍한 알린이 도와야겠다'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알린의 사연을 알려 도움받을 길을 열어준 건 대전 을지대학병원 신경외과 김한규 교수다. 보은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도 백방으로 뛰었다. 알린을 위한 성원이 전국에서 이어졌다.
알린은 심지어 자기를 때린 시동생에게도 고맙다고 한다. 그 날 그 밤이 아니었으면 뇌종양은 발견되지 않았을 거라고. 시동생 덕에 자기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고.
2천만원 지원받았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8년 11월, 알린은 KBS <사랑의 리퀘스트>를 통해 2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알린은 그 돈을 두고 '얼마나 고마운 돈이야' 한다. 알린의 생활이 여기서 좀 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알린의 수술비로 쓰고 남은 돈은 남편과 시동생의 입원비, 치료비로 고스란히 빠져나갔다. 자기들끼리 싸우다 생긴 상처를, 술이 망쳐놓은 형제의 몸을 돌보는 건 알린 몫이었다.
한국 사회는 알린에게 참 많은 상을 안겼다. 그녀는 ‘국제 효부상’도 받았다. ⓒ 김성인
한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알린. 한국은 여러 상을 그녀에게 안겼다. 알린이 처음 받은 상은 '국제 효부상'이다. 2007년 5월, 대한적십자보은연송봉사회에서 수여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한'데 대한 표창이다. 그 시절 동남아에서 '사 온' 외국인 며느리들이 겪는 갖은 고생은 효심으로 포장됐다. 상장엔 요즘 시대에 보기 힘든 '모범'이기에 상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다.
알린은 2006년도에 국적을 취득했다. 2016년, 한국JC특우회가 수여하는 '모범 외국인 근로자상'을 받았다. 귀화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외국인'이다. 그동안 알린은 표창장 및 상장 7개, 위촉장 2개, 교육 수료증 및 자격증 6개, 노래자랑에서 받은 상 3개까지 총 18개의 상을 받았다. 알린은 이 상들을 보물처럼 소중히 다룬다.
세월이 흘렀다. 식구 세 명이 줄었고 한 명이 늘었다. 알린을 때려 다치게 한 시동생은 2013년 농약을 마셨다.
둘째 시동생과 시어머니는 차례로 요양병원에 들어갔다. 새로운 식구는 필리핀에서 왔다. 알린이 결혼 전에 필리핀에서 낳은 아들, 조슈아다. 2015년 4월, 알린의 남편 초청으로 조슈아가 한국에 들어왔다. 막내 순호는 큰형이 생겨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조슈아는 한국에 처음 온 날을 기억한다. 그날도 아빠는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방에서 TV를 보며 소주를 홀로 따라 마시는 모습은 그날 이후 매일 반복됐다.
알린 이 올란데즈와 큰아들 조슈아가 고추밭에서 풀을 뽑고 있다. 집안일도 농사도 고스란히 두 사람의 몫이다. ⓒ 김성인
엄마와 큰형이 밭일하는 동안 막내 순호는 고추밭 옆 도로에서 보드를 타며 기다린다. 아직 두 발로는 못 타서 눕 거나 엎드려 탄다. 늘 있는 일인 양 혼자 잘도 논다. ⓒ 김성인
할머니도 아빠도 조슈아에게 잘해줬다. '친손자보다 더 좋아한다'는 게 알린과 조슈아의 표현이다. 왜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밥해주니까'.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말도 전혀 할 줄 모르는 조슈아는 새로 생긴 할머니와 아빠의 식사를 챙겼다. 쌀밥에 김치찌개 끓이고 '이거, 이거' 같이 볶고(조슈아는 그 음식의 이름도 모른다.) 그냥 눈치껏 배운 대로 한국 음식을 한 상 차려 냈다.
밥만 하면 다행이다. 조슈아는 종일 취해 있는 아빠 대신 농사일을 거들었다. 논에 물 대고 밭에 말뚝 박고, 엄마와 둘이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집안은 늘 난장판이다. 몇 해 전부터 알린의 남편은 술을 먹은 날이면 자면서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괄약근이 약해졌는지 매일 밤 전쟁이다. 그 오물을 치우고 이불을 빠는 일도 조슈아와 알린 두 사람의 몫이 됐다. 바다 건너 남쪽 섬에서 온 모자가 매일 밤 한 노인의 똥을 치우며 산다.
엄마를 닮아 눈이 반짝반짝한 조슈아, 그가 다음 화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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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