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생 겨울 편 12월 호 - 빛을 품은 딸과 나
12월 1일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돌아온 나는 이상한 느낌에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내가 겪어 보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맘때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이른 아침, 고이 잠든 전남편에게 다급하게 병원에 전화하라고 말하던 모습이.
2016년, 초겨울 어느 날.
여니는 그렇게 세상과 엄마를 만나기 위해 새벽과 아침 사이, 조심스레 노크했다.
두 아이에 비해 여니는 자궁 속이 좁았던 탓인지 위장까지 자리를 넓혀 있었다. 태동은 강했고,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 시절을 지나 지금 딸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쏟아지는 양수와 함께 병원을 찾은 날이 바로 12월 1일, 겨울을 앞둔 시점이었다. 엄마에게 온 딸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세상으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나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든, 유일한 딸이었다. 점심이 되어서야 나오려는 딸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아무리 같은 경험이 있어도,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걸 경험으로만 알 수 있었다.
12월은 나에게 축복이자 기쁨이었고 환희였다. 엄마라는 이름을 한 번 더 가질 수 있었던 날, 모성애를 다시 느낄 수 있었던 날, 모유를 먹일 수 있는 특권을 한 번 더 누렸던 날,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몸이 산산이 부서져 더는 일어날 수 없던 날들을 견뎌낸 끝에, 딸을 품 안에 안을 수 있었다. 버티고 견뎌내어 딸을 안은 일은 내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투병한 몸에 찾아온 아이 손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두 딸을 끝까지 키우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시절 인연이 있음을, 아무리 잡으려고 애를 써도 잡을 수 없는 순간이 있음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11월과 12월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그런, 달이다. 소박한 생일상 앞에서 모녀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하는 딸을 깨우고, 미역국과 밥을 먹여 등교시키는 일은 규칙이었지만, 그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기적처럼 소중하다.
케이크는 네가 여기에 온 것을, 축복하며 기뻐하는 일일지라도 딸에게 케이크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또한 모녀에게는 생일과 케이크는 일상이었다. 딸이 케이크와 선물이 필요 없다고 말할 때, 섭섭하고 아쉬웠지만, 모녀는 먹지 않을 케이크보다 각자 자신이 필요할 때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딸을 그렇게 낳았다. 빛보다 강하고, 여자보다 힘을 냈던 날이었다.
조용히 내리던 첫눈 꽃송이를 딸과 나눌 수 있다는 기쁨과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둘에서 셋이 되던 12월 1일이었다.
지금은 셋에서 둘이 되었지만, 삶이 그렇듯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도 지금을 살뿐이다.
작고 여린 딸이 소중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했다.
늦은 나이에 새 생명을 안을 수 있었다는 건 기적이었다. 아픈 몸에 꽃을 피워준 딸이 곁에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
간절한 것을, 품에 안았을 때, 나는 꿈에서도 아이를 지키려 했다. 조리원 문에서 들리던 똑똑똑, 그 노크 소리, 문을 열자, 단발머리 할머니가 서 있었다.
"아기 좀 보자. 아기 보러 왔다" 그 말에 나는 문 앞에 서 있었고 들어오려는 할머니를 막으며 아이를 보여주지 않았다. 곧이어 할머니는 돌아섰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선명한 꿈이었다. 의미 있는 꿈인 거 같아 엄마에게 전화했다. 딸이 전하는 말을 듣던 엄마는 삼신할머니가 아이가 건강한지 보러 온 거 같다며, 아침 식사 앞에서 기도부터 하라 했다.
꿈에서도 아픈 몸으로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한 나는 딸 안위를 가장 먼저 챙겼다.
겨울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아침 햇살이 비치는 날이면, 딸이 태어난 그날이 떠오른다. 겨울 햇살이 그래서 더 반가웠다.
딸을 낳고 맞이하는 열 번째 12월 햇살, 잘 지켜냈고 앞으로도 잘 지켜내리라 겨울의 시작 앞에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