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12일차)
우리의 다음 휴식지는 볼로냐(Bologna)였다. 여행지라는 표현 대신 휴식지라고 쓴 이유는 이번 행선지는 사실 처음엔 빈칸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 하면, 이탈리아에 온 초반까지 우리의 큰 그림에는 4/12~4/16(4박) 일의 기간이 미정이었다. 이 빈칸을 어떻게 채울까?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우리는 무리한 여행보다는 온전한 휴식에 집중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정한 곳이 볼로냐였기에 여행지보다는 휴식지라는 표현이 더 잘 맞는 셈이었다. 중부의 소도시들을 하루씩 가보는 것도 좋다는 가이드의 말도 떠올랐지만, 이번엔 우리 몸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한 곳에 머물며 휴식하라는)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2023년 4월 12일 수요일)
호텔 방문을 열고 캐리어를 끌고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얼굴에 새겨놓기라도 한 듯한 비즈니스 미소가 장착된 호텔 로비 직원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체크아웃을 하고, 사회와 중년생은 길 바로 건너편 메스트레 기차역으로 향했다. 플랫폼에 들어선 시각이 11시쯤이나 되었을까? 거의 체크아웃 마감시간에 나와 천천히 온 것인데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11:38분 기차 시간까지는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캐리어 두 개를 나란히 붙여두고 6번 플랫폼에서 멍하니 철로를 바라보던 그때. 눈앞으로 기차 한 대가 지나쳐갔다. 아주 짙은 곤색에 황금색 라인과 글자가 들어간, 한눈에 봐도 무척 고급스러운 기차. 속도가 빨랐다면 무슨 열차인지도 모른 채 스쳐갔겠지만 꽤 느린 속도여서 재빨리 사진을 몇 장 찍어 글자를 확인해 봤다. ‘VENICE SIMPLON ORIENT-EXPRESS’ 유명한 추리 소설에서나 들어 본 이름. 오리엔트 특급열차였다. “우와! 대박이야~ 정말 고급스럽다.”, “저런 거 얼마나 할까? 우리 나중에 꼭 타보자!” 사회와 중년생은 무슨 유명 연예인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흥분해서 사진을 보고 또 봤다. BAR 칸도 있었고, SLEEPING-CAR 칸도 있었다. 나중에 구글 검색으로 안 사실인데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런던에서 베니스 및 기타 유럽 도시까지 운행하는 고급 전용 열차 서비스를 말했다. 식사부터 모든 서비스가 최고급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가격은 음...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관심 있는 분들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란다.) 언젠가 타 볼 날이 있겠지? 있을까? 있길 바라자.
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우리의 눈앞엔 어느새 볼로냐행 열차가 천천히 멈춰 서고 있었다. 방금 전에 울트라 프리미엄 열차를 봐서인지 분명 빠르고 고급인 열차임에도 참 수수해 보였다. 국가대표 미남배우 얼굴을 본 직후에 동네 훈남 얼굴 본 느낌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동네 훈남 열차(?)에 올라 우리의 좌석으로 향했다. 텅텅 비어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열차 안은 거의 만석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열차의 출발역은 이곳이 아니라 한 정거장 전인 본섬의 산타루치아(Venezia Santa Lucia) 역이었다. 그리고 이 열차의 종착역은 로마 테르미니(Roma Termini) 역. 최고의 관광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쾌속열차인 데다가 호텔 체크아웃과 딱 맞아떨어지는 시간이니 사람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의 캐리어를 넣을 공간은 남아 있었다. 휴~ 사회와 중년생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고 열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20~30분쯤 지났을까? 승무원들이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감자칩과 같은 가벼운 스낵과 커피, 물티슈 등이 제공되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들리는 과자봉지 뜯는 소리와 와삭와삭 씹는 소리. 남친이 커피 쏟았다고 화내는 여친의 앙칼진 목소리. 과자 더 달라고 떼쓰는 아이. 커피 대신 주스 있냐고 물어보는 할머니. 잘 알아듣지 못하는 제각각의 언어였지만 뉘앙스만 봐도 자동 번역된 듯 이해할 수 있었다.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 사는 거 어디나 정말 똑같구나.’ 낯섦이 친근함으로 바뀌고, 긴장이 저절로 풀리고, 힐링되는 기분이었다.
열차는 소도시 파도바(Padova)와 페라라(Ferrara)를 거쳐 1시간 20분 정도면 볼로냐 센트랄레(Bologna Centrale) 역에 도착하는, 비교적 심플한 코스였고 거의 정시에 볼로냐에 도착했다. 역은 생각보다 컸다. 주요 도시를 이동하는 중간에 대부분 이곳을 지나치도록 되어 있는, 소위 말하는 교통의 허브 같은 느낌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까지는 피렌체와 라이벌일 정도로 중심 도시였다는 볼로냐와 우리의 1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가득한 날씨. 역 밖으로 나서자마자 도시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 분위기의 정체는 ‘젊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에 대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복장도 편안한 후드티에 운동화 차림이 대부분이어서 마치 한국의 대학가에 온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면, 로마나 베네치아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은 관광객이 대부분이었고, 볼 수 있는 현지인들은 상당히 옷을 갖춰 입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지금까지의 이탈리아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책가방을 멘 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채 시끌시끌 거리며 우리를 지나쳐갔다. 이따금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쳐다보면, 부끄러운지 안 본 척 고개를 돌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낯선 곳에 온 탓에 살짝 긴장은 되었지만, 그보다 더 큰 설렘에 두 사람의 얼굴이 기분 좋게 상기되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캐리어를 끌고 예약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역 주변은 바닥이 울퉁불퉁한 돌길이라 바퀴 달린 짐을 끌고 걷는 게 상당히 불편했는데, 다행히 시내 쪽으로 들어서자 거의 모든 건물 바깥쪽이 옛날 회랑처럼 지붕이 있고 바닥은 평평하게 되어 있는 구조여서 편하게 호텔까지 갈 수 있었다. 쭉 뻗은 도로를 따라서 세워진 건물 밖으로 지붕이 계속 있으니 비가 와도 우산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가는 길에 여러 중고서적을 파는 벼룩시장과 중년생이 좋아하는 소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보였다. 들러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짐이 무거웠다. 일단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숙소 상태를 파악하고 짐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드디어 호텔 입구가 나타났다. 우리가 선택한 숙소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오래된 호텔이었다. 몇 백 년 된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대신 대부분 보수해서 쓰는 이탈리아. 특히나 문화유산이 많은 도시 중심가 쪽의 호텔은 대부분 낡아 있었다. 하지만 사회와 중년생은 오히려 그런 면에 흥미가 많았다. 그리고 이 호텔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로비의 나무 데스크와 고풍스러운 벽지에 등불까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로비에 계신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직원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줄이 달린 돋보기에 상당히 볼륨 있는 헤어스타일까지 겸비한 그녀와 마주하니, 마치 클래식한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듯했다.
이 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2시부터인데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1시 반. 하지만 친절하게도 청소가 다 되어 있다며 체크인을 해주셨다. 받아 든 키도 예스러운 진짜 열쇠. 우리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려 10호로 향했다. 복도 천장은 아주 높았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310호 앞에 도착했다. 문은 나무 문으로, 옛날 열쇠를 구멍에 꽂고 몇 바퀴를 돌리니 철커덕하고 열렸다. 문도 손잡이가 두 개여서 양쪽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방은 넓었고 천장은 복도와 꼭 같이 정말 높았다. 천장의 전등을 어떻게 달았을까? 싶을 정도로.
낡은 거야 예상해서 괜찮았지만 방이 너무 어두워서 놀랐다. 불을 켜도 어두웠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커튼이 쳐져 있는 창가로 가봤더니 창문 밖으로 엄청 두꺼운 블라인드 같은 것이 내려와 있어서 어두운 것이었다. 안쪽으로 창문을 열고 블라인드를 살펴봤다. 단순히 커튼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방범의 역할도 하도록 설치된 것 같았다. 너무 견고하고 무거워서 꿈쩍도 안 했다. ‘어쩐다?’ 두리번거리며 고민하다가 창문 우측을 보니 블라인드를 조절하는 끈 같은 것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무언가 스위치가 있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중년생이 힘으로 끈을 당겨서 블라인드를 들어 올렸다. 높은 층고만큼 블라인드도 엄청 길어서 한참 용을 써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성공! “우와! 정말 멋지다!” 방 안이 밝아짐과 동시에 사회가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창문 밖으로는 아주 넓은 발코니가 있었고 그 너머의 도시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낡았지만 모든 것에 기품이 있었다. “분명 처음 지었을 때 아주 신경 써서 고급스럽게 만든 건물 같아.” 중년생의 말에 사회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짐을 풀고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벌써 2시 반이 지난 시각. 생각해 보니 오늘 먹은 거라곤 기차 안에서 받은 작디작은 감자칩과 커피뿐,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도 못했기 때문에 배부터 채우기 위해서였다. “아까 오는 길에 봤던 맥도날드 어때?” 툭 하고 던진 사회의 제안을 이미 배가 고플 대로 고파져 마음이 급해진 중년생이 덥석 물었다. 처음이라 아는 곳도 없고 시간도 애매해서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럴 땐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가 최고지. 버거 세트 2개(총 17.4유로)를 주문하고 야외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사회가 “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비둘기라면 기겁하는 사회 주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접근하고 있어서였다. 근데 이 비둘기. 한국과 성격이 전혀 달랐다.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자기 밥상인 마냥 테이블 위로 점프해서 앉는 것이 아닌가? “꺄아아~~~ 악!!!” 순간, 사회의 비명이 더 커졌다. 한국에도 길거리에 비둘기는 많지만, 야외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는데 저돌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만약 접근하더라도 무언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거리 이상은 절대로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선을 넘는 것은 물론 겸상이라니? 사회가 비명을 지를 만도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빈 테이블에서는 이미 비둘기 두어 마리가 올라앉아 앞 손님이 흘리고 간 빵가루로 포식 중이었고, 여성분이 혼자 식사 중인 테이블에서는 비둘기가 다가와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추측건대 이탈리아는 비둘기를 그다지 싫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우리나라보다 많은 것 같았다. 여튼, 평소 비둘기나 벌레에 큰 두려움이 없는 중년생은 손으로 비둘기를 간신히 쫓아내고선 최대한 바깥쪽 자리에 앉아 접근을 방어(?)하여 사회를 안심시키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버거를 감싸고 있는 각진 종이 포장지를 열다가 옆면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번역해 보니 ‘이탈리아산 닭 가슴살 100퍼센트’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도 먹는 건 국산을 강조하는데 어디나 마찬가지구나. 신토불이는 전 세계 통용인가 보다. 버거의 맛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맥도날드 바로 그 맛. 하지만 우리나라와 한 가지 명확하게 다른 점은 빵 부분이었다. 모양은 같은데 색이 짙은 갈색이고 모양이 단단히 잡혀있었다. 얼핏 보면 모형 같다고나 할까? 먹어보니 겉면이 확실히 단단한 느낌이 있었고 속은 부드러웠다. 맛있었다. 속에 든 내용물 보다 빵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버거였다. 이탈리아에 와서는 최대한 한국에 없는 것들로 배를 채우려고 했는데, 상관없겠다 싶었다. 같은 브랜드의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배고팠던 우리가 버거와 감자튀김과 콜라 세트를 뱃속에 전부 집어넣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 10분 정도였다. 급속 충전. “자. 이제 또 어디를 가볼까?”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며 두 사람은 바로 길 건너편 볼로냐 시내의 가장 중심으로 향했다.
볼로냐를 이야기할 때 따라다니는 두 가지 수식어 중의 하나인 ‘현자들의 도시(Bologna la dotta)’에 꼭 맞는 살라보르사 도서관(Biblioteca Salaborsa) 건물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2001년에 문을 연 볼로냐의 중앙도서관인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진 볼로냐 대학교와 함께 볼로냐의 큰 자랑이었다. 국적도 나이도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 역을 나서자마자 자유로운 차림의 젊은 대학생들이 많이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배움에 대해 활짝 열려 있는 도시답다고 생각했다. 도서관 앞 하얀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얼마간 쉬었다. 뜻밖에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할아버지들의 옷차림이었는데 너무 힙했다고 해야 할까? 약간 루즈한 면바지에 뉴발란스 운동화, 오버사이즈 코듀로이 재킷까지 멋스러워 눈길이 계속 갔다. 패션에도 열려 있는 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들어 바라본 바로 앞 광장에는 파란색 카펫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만 보니 모두 경찰차였다. 호기심이 생긴 사회와 중년생은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했다. 시대별로 진화(?)해온 경찰차와 오토바이에 관한 특별 전시회였다. “폴리찌아(Polizia)” 경찰을 뜻하는 이탈리아어의 느낌이 귀엽게 느껴져서 사회는 걸으면서도 연신 외쳐댔다. “폴리찌아!”
그 뒤로는 바다의 신 넵튠이 삼지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넵튠 분수(Fontana del Nettuno)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시가 펼쳐지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넵튠 광장(Piazza Nettuno). 이 광장을 검색하다가 넵튠이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임을 알게 되었다. ‘아, 여행이 이래서 알차구나!’ 바쁜 일상에 잊고 있었던 여행의 기쁨이 오랜만에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길을 따라 더 들어가니 훨씬 더 큰 마죠레 광장(Piazza Maggiore)이 나타났고, 정면 살짝 대각선 좌측으로 엄청난 크기의 독특한 성당이 눈을 가득 채웠다. 성당의 정면은 마치 위아래 둘로 잘라 나눈 것처럼 아랫부분은 고급스러운 흰색 계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윗부분은 겉을 치장하기 전 그냥 벽돌채로 드러나 있는 맨몸 같은 상태였다. “뭐지? 짓다 만 것처럼.” 정체는 산 페트로니오대성당(Basilica di San Petronio)으로 놀라운 것은 정말 짓다 만 건축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짓긴 지었는데 옷을 반쯤 입은 건축물이랄까? 독특한 외관 때문에 좀 더 시간을 내어 천천히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자세히 역사를 들여다보기엔 이미 오후 시간. 볼로냐에 온 첫날이니만큼 시내를 가볍게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오늘은 일단 휘~ 한 바퀴 훑자!”, “오케이, 콜!” 중년생과 사회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두 개의 탑(오늘의 표지 이미지입니다만)과 볼로냐 대학교가 있어 마치 미리보기라도 하듯 쓱- 찍고 지나갔다. 상점가들도 있어서 사회가 필요하다는 로션과 팩, 립밤(총 25.3유로)을 사고 문구상점에 들러 호텔에서 신을 슬리퍼와 펜, 노트(총 25.35유로)도 구매했다. 산 물건들도 둘 겸, 조금 쉴 겸 해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는 젤라또(총 6유로)도 하나씩 핥으며 여유를 부렸다. 쓰는 돈 맛이 쏠쏠했다.
젤라또로 위장에 임시 풀칠을 한 덕분인지 분명히 배가 고프지 않았었는데, 숙소에 돌아온 지 1시간쯤 지나서부터일까? 얼마간 휴식을 취하자 좀비처럼 또다시 솔솔 일어나는 허기. 사회와 중년생은 떨어지는 해를 느끼며 음식점을 찾기 위해 다시 무작정 볼로냐의 거리로 나섰다. 사실 아주 약간의 계획은 있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눈여겨본 식당이 하나 있었다. 하얀색 나무로 된 외관에, 손으로 써 놓은 칠판 메뉴가 걸려있는 집. 툭툭 무심한 듯 꾸며놓은 외관이 보자마자 맛집이다 싶었다. 호텔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일단 가서 기웃거려 보기로 했다. 가게에 가까이 가자 딱 봐도 주인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나오셨다. 인상이 너무 좋으셔서 그냥 여기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도 되냐고 묻자 우리에게 음료나 술을 마실 것인지, 아니면 식사를 할 것인지를 되물으셨다. 알고 보니 식사는 8시부터 가능한 식당이었다. 시계를 보니 7시. 우리는 일단 알겠다고 말하고 길거리를 거닐며 상의하기 시작했다. “배도 고픈데 다른 데서 먹을까?”, “아, 근데 뭔가 맛있을 것 같은데, 그치?”, “그래, 뭔가 끌린다 그 집.”, “기다렸다 8시까지 다시 가보자!” 열띤 토론을 벌일 만큼 우리에게 새 도시에서의 첫날 저녁식사는 중요했고, 치열한 대화 끝에 결국 광장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다. 다른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진 한 시간이었지만 8시가 다가오자 설레기 시작했고, 우리는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식당 방향으로 향하면서 같이 걷는 다른 무리들을 볼 때마다 모두 우리가 가는 식당으로 가는 것만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다. ‘만석이 되면 어쩌지?’란 초조함에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걸음이 거의 뛰다시피 할 때쯤, 우리는 드디어 식당 앞에 도착했다.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서 있었다. 걸음은 멈췄지만 이번에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못 먹을까 봐 저렇게 긴장했던 모습이 너무 웃기게 느껴진다. 정확하게 8시가 되자 사람들이 열린 문으로 몰려 들어갔다. 야외 테라스에도 사람들이 거침없이 앉기 시작했다. “어, 우린 어쩌지? 그냥 앉아도 되나?” 하며 두 사람이 망설이고 있는데 아까 그 사장님이 활짝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너희 왔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사장님은 우리에게 올 줄 알고 비워뒀다고 말하며 야외 좌석으로 안내해 주셨다. 감동이었다. 쭈볐대던 관광객 커플이 다시 올 것을 생각해서 배려해주시다니.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리에 앉아서 크게 심호흡을 하며 빠르게 뛰던 심장을 천천히 가라앉히자 이번에는 식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어서 주문을 해야 한다.’, ‘어서 맛있는 것을 배에 밀어 넣어야 한다.’ 두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메뉴판을 찾았다. 이 식당의 메뉴판은 두 가지였다. 거친 필기체로 칠판에 써 놓은 아날로그 메뉴판과 테이블 위에 놓인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볼 수 있는 스마트 메뉴판. 우리는 두 가지 버전이 다 궁금했다. 중년생은 칠판 사진을 찍어 스마트 번역기를 돌려 최대한 메뉴를 유추해 냈고, 사회는 QR코드 메뉴판으로 들어가 영어로 메뉴를 훑어봤다. 우리의 선택은 탈리아텔레 라구 볼로네제(Tagliatelle Ragu bolognese)와 토르텔리니 인 크레마(Tortellini in crema), 그리고 살루미 에 포르마지(Salumi e formaggi)였다. 선택한 이유는 첫 번째 메뉴는 라구, 볼로네제라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봐서였다. 찾아보니 라구 소스는 이탈리아의 전통 미트소스를 총칭하는 말이었고, 볼로네제 소스는 라구 소스의 일종으로 볼로냐에서 시작된 소스를 뜻했다. 쉽게 말해서 볼로네제라고 하면 우리가 토마토 파스타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토마토 베이스의 미트소스. 딱 그것의 원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 덧붙여서 탈리아텔레라는 말은 넓적한 파스타 면의 일종을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 메뉴인 토르텔리니는 정말 작은(손가락 한 마디만 한) 만두 형식의 파스타인데 이것도 볼로냐에서 태어난 음식이어서 선택했다. 가장 대표적인 토르텔리니 요리는 육수에 넣어서 끓인(정말 만둣국 같다.) 토르텔리니 인 브로도(Tortellini in brodo)인데, 이 가게에 있는 메뉴는 크림소스를 곁들인 스타일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메뉴는 이제는 우리의 당연한 선택이었다. 종류별 생햄과 소시지와 치즈를 함께 썰어낸 메뉴이기에 와인과 어울릴 것은 자명했다. 우리는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들고 사장님과 눈을 마주쳤다. 앉으면서 주문했던 물 한 병과 함께 다가오시는 사장님. 중년생은 천천히 또박또박 메뉴를 읽으며 주문하기 시작했다. “탈리아텔레 라구 볼로네제.” 첫 번째 메뉴를 읽는데 사장님이 그 메뉴는 안된다고 하셨다. “헛!” 순간 당황한 중년생의 표정을 읽으셨는지 능숙하게 다른 메뉴를 추천해 주시는 사장님. 같은 탈리아텔레면서 반죽에 채소가 들어가 녹색을 띠는, 역시나 엄청 맛있는 메뉴라고 하셨다. 가격도 동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머지 두 메뉴는 순조로웠다. 사장님께서 살루미는 파스타 천천히 먹고 나서 말해주면 그때 준비해 주겠노라고 하셨다. 우리의 주문엔 와인도 빠질 수 없었다. 메뉴를 보니 글라스 와인 리스트도 상당히 다채로웠다. 글라스 레드 와인 중에 볼로냐 산이 있어 2잔을 주문했다. 흡족해하시는 사장님의 표정. 아직 이 집에서 아무것도 먹어보지 않았지만 이미 대성공의 느낌이 밀려왔다.
파스타가 나오자마자 우리는 주저 없이 포크질을 시작했다. 예상과 실제가 완벽하게 일치했을 때의 짜릿함. 소름까지 돋고 말았다. 너무너무너어~~~ 무 맛있었다. 금세 와인 한 잔과 파스타 두 접시는 바닥을 드러냈다. 사장님이 어떻게 알고 계셨는지 때마침 다가오셔서 그릇을 치워주시며 살루미를 가져다줘도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우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함께 마실 레드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아마로네 모로피오(Amarone Moropio 2019). 너무 좋은 선택이라고 말해주시는 사장님의 말에 속물처럼 기분이 더 좋아졌다. 살루미와 와인의 조화는 환상적이었다. 잘 보관된 와인은 정말 꽃 같이 향긋했고, 치즈와 살루미를 만나자 꿀처럼 달콤하게 변했다. 볼로냐의 두 가지 수식어 중 또 하나인 ‘뚱보들의 도시(Bologna la grassa)’라는 말이 정말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 온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먹었던 음식 중에 단연코 1등이었다.(총 65유로) 사회와 중년생의 입으로 미식의 도시라는 볼로냐의 별명을 온전히 체험한 순간이었다. “여기 진짜 잘 왔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며 사회가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중년생에게 말했다. “내일은 뭐 할까?” 중년생이 말했다. “뭐든!” 사회가 웃으며 기분 좋게 외쳤다. 벌써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렇게 볼로냐에서의 첫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