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챗 지피티보다 나은 일꾼이 되는 법

이직은 울퉁불퉁함을 끌어 안는 과정인가봐

by 배추도사


른수야,


네가 MRI검사를 받았다는 말에 출근길 지하철에서 깔깔 웃다가 그날 오후 바로 나야말로 MRI를 검사를 받아야겠다 생각을 한 사건이 일어났어. 8년 차 차장급이 했다고 믿기 어려운 사건을 나열해 볼게.


- 지우면 안 되는 공용 파일과 백업 파일까지 삭제함

- 주말 업무 투입 시간을 파리 현지시각으로 메일에 볼드체로 안내 돼 있는데 팀원들에게 한국시간으로 공지해, 모두의 스케줄을 재조정하게 함.


업무 지시 못 알아먹어서 상사 속 터진건 다반사라 구구절절 쓰지 않을게. 매주 한 번씩 사수가 면박을 주거나, 동료에게 '너 일 개 못해'라는 말을 대놓고 듣는 나날들도 있었어.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원인제공자가 ‘나’라 변명할 여지도 없고 수습하고 사과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이 상황이 짜증이 나고 도망가버리고 싶어. 이재명 정부 들어서 실업급여도 퇴사자에게 준다고 하는데 나도 해당되나 찾아보기까지 했어.


이직한 회사에 적응 못하고, 나도 나 같은 애랑 일하기 싫을 거 같은 나날, 그런데 무슨 자존심인지 '나도 너네랑 일하기 싫거든? 흥!' 하면서 눈물을 왈칵 쏟아내면서 힘껏 노트북을 닫으면서 생각했어. ‘하, 내가 왜 이러지’ 분명 신입사원도 겪었고, 3번의 이직을 하면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실수가 잦은 법이고, 그 집단의 규율이나 분위기가 낯설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이 소요되고, 모두의 평가 안테나가 나를 향해 있어서 하나부터 열 가지 다 평가당하는걸 한두 번 겪은 애도 아닌데, 이번에는 적응기간도 오래 걸리고, 그 과정도 잘 못 견디는 내 모습이 낯설고 왜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 머리가 커져서 오만해진 걸까. 왜 이렇게 뻔뻔하지 라는 생각 끝에,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서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어.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개그우먼 이수지야. 그녀의 콩트를 보면서 '어떻게 자기가 잘하는 일을 찰떡같이 찾았을까'하며 진지하게 바라보게 돼. 솔직히 난 이 직장을 선택한 건 대졸, 35살 여자에게 적당한 직급과 연봉에 맞춰서 사회적으로 예측가능한 사람으로서 적당한 타협을 하고 있거든. 나는 사업을 하고 싶어.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고, 그걸로 콘텐츠를 만들거나 세일즈를 하면서 인사이트를 얻고 매출을 만드는 일이 정말 재밌거든. 근데 뭘 팔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당장 내 연봉만큼 돈 못 벌잖아. 적당한 돈은 받아야지, 무시당하기도 싫지 그러니 적당히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는데. 잘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도 너무 못하고 게다가 도망갈 생각을 하면서 혼란스러운 요즘이야. 퇴근 후 이수지의 유튜브가 유일한 낙인데, 문득 궁금하더라고. 희극, 연극이야 말로 박봉이고, 성공 확률도 낮은데 40살이 될 때까지 이수지는 무슨 생각으로 계속 개그 업계에 남아서 자신을 단련하하고 실력을 연마했을까. 그녀에게 직업은 도대체 무슨 정의일까. 가난하게 살면서도 개그를 할 때 그녀는 행복했을까. 나는 어쩌면 그녀의 힘든 시절보다 더 돈을 많이 받고, 편하게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왜 투덜거리고 도망치고 싶은 건지, 잘못했으면서 왜 야비해지는지 계속 되묻게 돼.


른수가 말했듯 '인사'를 잘하는 동료에 대한 목마름이 나도 있어. 우리 회사는 주 3일 재택근무를 하는데, 아직 동료들과 친해지지 못한 것도 있지만 무언가 일을 하다 보면 Chat GPT가 된 기분이 들 때가 많아. 채팅창에서 동료가 전달되는 말을 그대로 잘 이해하고, 그 입력값 그대로 원하는 결괏값을 찰떡 같이 내는 것이 일의 디폴트가 된 요즘이야. Chat GPT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서 실수하고 잘못하면 '노동 소외'를 느껴. 챗 지피티는 얼레 벌래 물어봐도 3초 만에 답을 깔끔하게 잘해서 더더욱 내가 멍청하고 가치 없게 느껴지기도 했어. 그래서 말이야, 마라톤에서 응원문구를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웬만한 응원문구에 심드렁한데, 이번에 시드니 마라톤에서 누가 'Chat GPT can't help with this'라는 푯말을 들고 있는데 나 긁혔잖아. 내가 완주라도 해야지 쳇지피티보다 잘하는 건 하나라도 있을 거 같아서 완주했잖아.


인간은 당연히 실수하고, 서로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여러 번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며, 여기저기 폐를 끼치면서 얼래벌레하면서 힘겹게 결과물을 만드는 존재인데,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한 번만에 알아먹는 챗지피티 덕에, 처음부터 완벽한 답을 내놓는 챗지피티덕에, 완벽함이 디폴트가 되고 서로 미안하다, 고맙다, 부탁하는 게 낯선 시대가 된 거 같아. 그리고 나 또한 설명을 차근차근하는 게 어색하고, 모르는걸 동료에게 물어보는 게 바보가 된 거 같아지고. 분명 모니터 너머 사람인 동료가 있을 텐데, 채팅창에 대화가 아닌 입력값과 결괏값만 주고받는 사이가 된 느낌이 들 때가 많아. 회사를 다시 돌아온 것은 누군가와 아웅다웅하고, 울퉁불퉁하더라도 온기가 느껴지는 이야기를 하는 거였는데 재택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업무 하면서 느껴지는 차가움도 느끼게 돼. 그러면서 오해도 쌓이는데 또 출근해서 단둘이 대화해보면 따뜻한 사람이고, 채팅창에서 보인 것만큼 나를 미워하지도 않으며, 서로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되는데 말이야. 근데 또 한편으론 직장에서 온기 타령하는 사람일수록 늙은이인 거 같기도 해.


은수와의 뉴스레터를 주고받는 것도 어쩌면 울퉁불퉁하고 부족한 소통을 하면서 결과물 완성한다는 갈망을 채워주는 거인 거 같아. 그래서 초고가 별로고, 조회수가 안 나와도, 그저 우리 둘의 꼼지락으로 끝나더라도 완벽해. 네가 우리 망하면 어떻게, 아직 부족한 거 같은데라고 말해도 불완전한 거라도 빨리 내보내자고 우긴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어. 그리고 이번 편지를 쓰면서 알았어. 내가 적응을 못하고, 아직 동료들과 어색한 건 너무 당연한 인간사라는 것을. 그러니깐 이 울퉁불퉁하고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고, 견뎌서 내가 선택한 회사에서 성장하고 난 뒤에 졸업하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해 준 건 허우적거릴 때 괜찮다고 따스하게 말해주거나, 다시 전화로 따끔하지만 그래도 츤데레로 말해준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동료에게 미안함과, 민폐를 끼치는 걸로 끝나지 않고 미운 정 고운 정을 쌓고 잘 적응해서 나도 성장해서 무언가 보답하고 떠나고 싶어.


다시 개그우먼 이수지로 돌아와서 편지를 마무리할게. 그녀가 개그우먼이 되겠다고 선택한 건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겠지.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어떤 직업과 극단을 선택했겠지. 그땐 챗 지피티도 없었으니깐 온전히 그녀 마음의 선택이었을 거야. 그리고 불안, 좌절, 후회를 했겠지. 나 또한 이 직장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 완벽하지 않는 회사지만 외국인 동료와 일할 수 있고, 중간관리자로서의 역할, 소통을 잘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어 보였고 돈까지 주잖아. 그리고 급변하는 AI 시대 꼭 필요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고. 그래서 지난 5개월간 웅크려있고, 외롭던 시간들이 더 많은 회사생활이었지만, 나는 인간이고, 불안함과 동거하고, 모지란 나를 혐오하기보다는 다독이고, 또 나랑 잘 맞지 않는 동료를 미워하기보다는 부대끼면서 무언갈 만들어간다면 분명히 챗지피티보다 뭐 하나 나은 일꾼이 될 거라고 믿어. 그러니깐 월요일이 오는 게 두려웠는데, 좀 마음이 낫네. 지금 내가 회사에서 해보려는 것들 다 'Chat GPT can't help with this'니깐. 앞으로 AI시대에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불안함과 부족함을 즐기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에 훌쩍 다가가 볼게!


다시 태어나도 챗지피티 보단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은 배추가


keyword
이전 03화MRI검사는 "실수를 인정하라" 말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