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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I검사는 "실수를 인정하라" 말했지

이건 내가 아니야, 근데 나야

by 배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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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에게


'너 일잘러야?'라는 배추의 질문에 자신있게 '응!'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어.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을 잘하는 게 뭘까?' 고민 정말 많이해. 그리고 꽤나 괴로워하고 있지...


이직을 해서 이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 거 같아. 과거 기억이 미화되듯이 내 첫, 전 회사에서의 업무들에서는 어느 정도 스무스했던 기억이거든. 업무 시간 동안엔 바쁘지만 집중해서 그럭저럭 일하고, 시간 내 일을 마치면 퇴근길에 그지없이 뿌듯하고 좋았어.


그래서 소속이 바뀌고 환경, 같이 일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나라는 사람은 그대로니까 초반 적응기만 지나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 일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날의 일을 척척 해내고, 퇴근 시간에 퇴근하고. 그렇게 한 권 한 권 책을 만들고, 모든 책이 다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간간이 중쇄 찍고 어떤 책은 중박, 어떤 책은 가아끔 대박을 치는... 그런 삶을 꿈꿨고 약간의 자신도 있었어.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고.


신입으로 시작한 일터가 아니니, 나름의 경력으로 뭔가 보여주고 싶었는데..!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조급했던 걸까?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많이 했어. 단순한 산수를 틀려서 외근 신청서의 외근 시간이 틀리거나 틀리면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수치를 틀리게 기입해서 큰일날 뻔한 적도 있고(가까스로 사고가 되기 전에 실수를 발견해서 고쳤으니 다행이지만..), A 단체방에 써야 할 내용은 전혀 상관 없는 B 단체방에 올리기도 하고. 그야말로 허둥지둥, 어리버리, 얼레벌레, 그 자체였어. 특히 여러 업무가 몰렸을 때 더 심해졌어. 그래서 나 비싼 돈 들여 뇌 MRI도 찍었잖아.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실수하는 내가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거든! 아파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닌 이상 이럴리 없다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달까. 근데 허무하게도 내 뇌에 아무 문제 없대. 당연히 안 아파서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이렇게 실수하던 게 아프지도 않은 내 원래 모습, 내 일부라고? 받아들이려니 마음이 아팠어. 흑흑.


주변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면 괜찮다고들 위로해줘. (다정한 친구들ㅠㅠ). 큰 사고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괴로워하냐고 말이야. 그런데 어떤 업무든 꼼꼼하지 못해 한 실수는 결국 크든 작든 다른 동료에게 피해를 주잖아. 누구나 바쁜데 그걸 다시 체크하는 데 에너지가 드니까. 그렇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무엇보다 이런 실수하는 내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거니까 창피하고 때론 수치스러워. 서로 그다지 다정하다고 할 수 없는 관계인 코워커들에게니까. 특히 인사권자인 나의 상사에게는 일 잘하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가장 별로인 내 밑바닥의 모습을 최다로 선보이고 있는 거 같고.


혼자 이런 마음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다가 시선을 밖으로 좀 돌려봤는데 내가 내 모습만 너무 의식하고 있어서 못 보던 모습들이 보였어.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를 돌아돌아 가는 a동료, 숫자를 나에게 틀리게 알려줘서 여럿을 힘들게 한 b동료 등등. 아... 직급 상관 없이 다들 이러고 사나보다- 싶었어. 매끄러운 일들이 척, 척, 척, 이루어지는 게 회사가 아니라 '조금 모자라지만 뭐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삐걱 삐걱 비틀비틀 하면서 목표한 곳으로 같이 나아가려는 게 회사 일이구나' 싶어. 그래서 배추의 첫 편지를 보며 백 번 끄덕끄덕했지.


그런데 말이야. 그래서 다들 실수하고 고치고 같이 수습하면서 나아가는 동료 관계에 대한 생각이 친절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어. 실수하면 사과하고, 실수에 괜찮다면서 어떻게든 해결해주려는 그런 동료가 되고 싶고 그런 동료와 함께하고 싶었거든. 하지만 요즘은 회사에서 같이 일을 해내는 거면 됐지, 친절을 바라는 건 이상적이고 과한 걸 수 있겠다고 생각도 들어. 가령 회사에서 '죄송하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많이 하면 바보되는 거라고들 많이들 말하잖아. 나는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 정말 싫거든. 그게 일터 안이든 밖이든 말이야. 그랬는데 '이런 내 호오가 과연 회사에서도 적용되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동료여도 어떻게든 함께 일을 해냈으면 그걸로 서로의 밥값은 한 건데, 친절까지 바라는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 잘 알지.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나에겐 그에게서 알게 모르게 받은 상처가 남아 있더라고. 그 크고 작은 상처들을 곱씹으면서 '친절한 동료를 만나는 것'이 특별한(=잘 없는) 행운이고 복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말 그대로 행운이고 복일뿐, 당연한 게 아닌 거 같고. 그러니까 상처받는 내가 너무 미숙한 사회인인 걸까? 음... 잘 모르겠어.


그래도 난 친절하게 일하고 싶고 친절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데. 친구와는 또 다른 관계인 동료가 너무 어려워. 그리고 그들과 인생의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삶이 더 어렵게 느껴져, 배추야. 드라이하게, 매끈하게 척척 업무를 해내는 건 애초에 현실에 없는 이데아인가 싶기도 하고. 어떻게 일하고 어떤 동료가 되어야 하나, 계속 고민하게 돼.


월요일이 다가와서 또다시 괴로워하는 른수가, 친절한 친구 배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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