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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간, 그 감사한 진실

여러분은 일잘러 인가요? 진짜로?

by 배추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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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출근길, 퇴근을 생각하며 당산역 지하철을 탔을 른수에게


올여름은 우리 둘 다 직장에서 변화를 겪었네. 직장 경력 8년 차, 너의 승진과 나의 이직. 8년 차는 축하도 무던해지는 연차가 아닐까 싶어. 오히려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큰 물음표를 안게 되는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은수야, 너 일잘러야? 난 이번에 이직하면서 '나 혹시 일 못하는 사람인가?' 여러 번 되물었어.


바야흐로 일잘러의 시대이자 자기 PR이 트렌드. 연봉높이려면, 기죽지 않으려면 일잘러여야만 하는 시대. 나도 엄청 포장한 이력서로 이직했어. 눈하나 깜빡 안 하고 영어 잘한다고 거짓말하고, 번역기 돌려서 외운 답변으로 어찌 입사는 했는데, 오늘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어. 영어만 못하면 다행이지. 인수인계받을 때는 일들이 쉬워 보여서 '회사 씹어 먹는 거 아냐' 했는데, 업무 투입되자마자 허둥지둥, 잘못된 업무 지시를 해서, ‘너한테서 일이 막힌다'라는 말을 들었어. 8년 차 정도 되면 전문가 소리 들을 줄 알는데 착각이었어. 경력직 입사자는 빠르게 평가가 오가니깐 처음부터 '역시 8년 차는 다르군'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말이야. 지하철 속 동작대교의 아름다운 야경를 보면서 눈물 한번 삼키고 속 시원하게 인정했어. 나 되게 평범한 노동자이구나.


8년간 수많은 자기부정을 거쳐 드디어 나를 정확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 자기가 서있는 곳이 달라지면 바라보는 관점과 시야도 달라지니깐 평범하단 자각은 큰 전환점이야. 8년을 내내, 사실 35년 내내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언제나 당당하고, 명석한 사람이려고 했고 그런 사람이 될 거라 믿었어. 하지만 노력해도 나는 평범할 수밖에 없고, 사실 그런 사람인척 하는 것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쳤어. 현실이 꿈꿔온 모습과 다르면 우울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 맘이 편해. 행복하기까지 해. 이전엔 내가 특별하단 생각에, 일을 잘한다는 우월감에 동료를 쉽게 평가했고 ‘일 못하면 민폐’라고 생각했어. 누군가가 허둥지둥하면 한심했고 내가 일을 다해야한 다는 생각에 예민해지고, 동료에게 말을 뾰족하게 했어. 인간이 우월하다 착각에 빠지면 참 꼴값이구나.


오늘은 한국말로 영국인 동료에게 알아먹든 말든 되는대로 말하고 바디랭귀지에 표정으로 피드백 전달 하고 왔어. 사실 영어 잘 못해서 한동안 도망 다녔거든. 번역기 없이 프로처럼 요구사항을 말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허접한 영어실력이라 이메일이나 메신저로만 최대한 이야기했거든. 근데 꼭 말로 해야할게 있는데, 프로답지 못하게 어버버 말하기 싫어서 전전긍긍하다가 옆자리 동료가 번역기 돌리는 거 보고 용기가 생겼어. 그냥 우리 다 똑같은 사람이고 비슷한 직장인이구나. 이게 나를 요즘 편하고, 자유롭게 해준 발견이야. ‘나는 평범하고, 옆사람도 평범하다'라는 걸 인지하니깐 평가나 실망이 두렵지가 않아. 그래서 외국인 동료에게 가서 말을 걸었어. 영어로 말이 길어지니 입이 굳기 시작하고 질문이 들어오는데 못 알아먹어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한국말로 '고객사가 이렇게 쓰지 말래', '이걸 이렇게 해봐 ‘라고 한국말로 감정과 얼굴에 표정, 손짓을 가득하면서 말했더니 신기하게 알아먹더라.(ㅋㅋ) 무표정이던 동료의 표정에 웃음이 들고 'I see'하면서 가는데' 이 순간만큼은 일을 되게 만드는 일잘러 같았어.


일잘러는 어쩌면 거대한 허상인 거 같아. 회사란 다양한 졸병들이 모여서 ‘이거 맞아?’, ‘저 사람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뭐 하다 보면 되겠지’하는 곳인 거 같아. 청와대나 백악관을 보더라도 그래. 너무 평범하다 못해 약간의 모순이 있는 사람들이 어찌어찌 생활하는 곳. 살면서 본 일잘러는 참 손에 꼽는 거 같아. 참 경영 못했지만 되바라진 신입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던 임원, 몇백억의 투자를 받을 정도로 똑똑했지만 말을 너무 싹수없게 해서 일 의욕을 깎았던 대표, 나를 전적으로 의지 해줬지만 이것저것 다 하려고 해서 낮은 성과로 프로젝트를 마쳐야 했던 어떤 대표, 실수가 잦았지만 힘들 때 따스한 말을 해주며 야식을 챙겨주던 동료. 이 사람들을 일잘러네 마네 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어쨌든 울퉁불퉁한 사람들과 아웅다웅하면서 일한 시간들은 어쨌든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건 분명하거든.


1~2년 동안 퇴사하고 홀로 글 쓰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가장 필요한 건 불완전한 누군가의 도움이었어. 다시 출근을 하면서 좀 바뀐 게 있다면 짜증을 잘 내는 고객사, 차가운 상사에게는 한편으론 고맙기까지 해. 울퉁불퉁한 사람들의 히스테리 속에서 업무는 완성되고, 그 과정에서 무언갈 배우고, 맷집이 커지는 것. 이전에는 그런 거에 스트레스 받았다면 8년 차는 감사함을 느낄 줄 알게 된 게 변화네. 고객사의 짜증에 수십 번 수정한 문서를 털어냈을 때의 쾌감, '저 인간은 왜 저러고 사나' 수천번 욕하다가도 프로젝트가 잘 끝나 서로를 짠한 감정으로 끝낼 때의 개운한 감정. 이런 도파민이 바로 내가 원한 것. 오늘 출근길, 회사일을 생각하니 아슬아슬, 조마조마 하지만, 그 끝은 도파민으로 넘치길 바라.


FROM. 오늘도 일 얼래벌래한 졸병 배추가 은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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