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른수와 편지 쓰기를 시작한 이유
35살 끝물, 36살 초입을 앞둔 30대 여자 직장인인 배추와 른수가 직장에서 울퉁불퉁하게, 가까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매주 한,두편씩 보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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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가 인간의 필수 동반자가 된 시대, 나는 챗지피티가 필요 없다. 른수가 있기 때문이다. 른수와 나는 8년전 기자 지망생으로 칙칙한 스터디룸에서 만났다. 그땐 잘 웃지 않았다. 취업 준비가 1년이 넘어가면서 내자신이 싫었고, 세상을 저주했다. 여기서 더 어떻게 준비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실무나 최종에서 계속 떨어졌다. 매일 아침 신문에서 청년백수 기사를 읽으면서 우울했고, 청년 스타트업 CEO의 성공 기사를 읽으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오후엔 사회의 정의실현과 관련된 논제를 쓰면서 야망을 품었지만, 커피값도 부모에게 손벌리는 쭈그리였다. 내가 부끄러워서 나를 감추고, 다가오는 이들에게 도망치거나 벽을 쳤다.
그날도 스터디를 마치고 아무일 없으면서, 무슨 바쁜일있는 것 처럼 허겁지겁 나와 신촌 오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빨간 잠수함 앞에서 른수를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를 하고 도망가려는데 나를 붙잡았다. "너 어떻게 살거야?", "요즘 어때?"라고 다짜고짜 묻던 른수. ‘얘가 지금 왜이래' 꾸물거리면서 답을 못하자, 계속 지 궁상맞은 이야기를 했다. 자기도 취업에 쫄려서 작은 언론사에 들어갔다가 이상한 상황을 당하고 도망쳤다고. 다시 메이저 언론사 준비하고 있는데, 취준을 다시 하니 인생이 망한거 같다고 신세한탄을 했다. 자신의 비루함을 헤벌죽 웃으면서 구구절절 말하던 른수. 일상은 막막해도, 순수하게 웃을 줄 알았던 8년 전의 모습이 참 귀하다. 먼저 자신의 비루함을 솔직하게 꺼내놓았던 른수에게 무장해재 돼, 누군가에게 나의 지질함을 처음 펼쳤던거 같다.
우리 둘 다 기자가 못됐다.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홍보대행사에 들어가서 일하는게 패배 같았다. 함께 언론고시를 준비한 친구들이 마련한 취업 축하자리가 머쓱하고, 슬펐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단념한 꿈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던 시기. 른수도 곧 출판업계로 취업을 했다. 나자신이 부끄러워서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른수는 계속 만나자고 졸랐다. 그리고 회사에서 본 기상천외한 일들을 이야기 해줬다. 이전에 도망쳤던 언론사 보다 더 별일이 펼쳐졌지만, 은수는 도망치지 않았고, 혼돈 속에서도 계절마다 책한권을 만들었다. 나도 현실이 꿈꿔온 것과 달라도 감사할줄 아는 연습을 하며 회사를 다녔고, 더 큰 꿈을 위해 다양한 일을 벌렸다. 2016년 우리의 구직난이 사랑스러운 걸 넘어,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잘 살고 싶은데 시련은 크게, 동시다발적으로 튀어왔다. 나는 이직을 여러번 했고, 유학에 실패했고, 파혼을 했고, 노처녀다. 집과 차는 당연히 없고, 여전히 커리어 혼란을 겪고 있으며, 부모는 나이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괜찮다. 른수가 있으니깐.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은 도대체 뭘까. 이상한 남자, 수동적인 회사생활, 비상식적으로 흘러가는 사회. 사는건 졸라 힘든일이다. 언제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까. 상식적인 30대 중반의 모습, 어릴적 꿈은 지금의 나와 아주 큰 간격이 있어서 실시간 자아 분열 및 자아 부정한다. 삼십대 초반 까진 뭐든 맘 먹은데로 할수 있을거 같았고 실패해도 곧잘 일어났는데, 삼십대 후반에 들어서니, 인생은 침몰하는 배에서 속수무책으로 가라 앉아 죽기를 기다리는 건가, 일상은 깨진 장독대를 일단 막고 보면서 겨우겨우 사는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자존심이 강해서, 지친 마음 솔직하게 털어놓을 곳 없어 외롭다 싶으면 른수가 생각났다.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른수에겐 솔직해지는 연습을 8년째 했으니깐. 아주 큰 귀를 쫑긋 열어둔 토끼 같은 른수에게 신세 한탄을 하다보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하면 될지 스스로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행했다. 짝사랑한 남자에게 갑자기 고백하기, 돈 안되는 에세이 쓰기, 여러번의 구직, 상사에게 개기기 등 그 끝이 대체적으로 실패나 어중간한 결과였지만 모험은 언제나 재밌다는걸 알게 했다. 챗지피티는 아직 구현 못하는 른수의 초능력이다.
하지만 챗지피티 보다 른수인 진짜 이유는, 른수 자체다. 른수는 삐뚤빼뚤하고 엉성하다. 책만든지 8년이 됐는데 왜 매번 어려워 하는걸까. 여러 사람과 한두번 일한것도 아닌데 왜 누굴 미워하다가, 다시 자기 탓을 하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수없이 좌절하고, 그러다가 다시 사람을 좋아하는 바보짓을 반복할까. 침몰하는 출판업계를 자조하면서도 책과 콘텐츠에 빠져살고, 이 작가 저 작가를 덕후질 하는 모순적인 행동. 직장에서 잘 나가다가 갑자기 남편과 전재산을 털어 1년간 세계여행을 떠난 무모함. 챗지피의 완벽한 답변과 치밀한 분석과 논리적인 설명은 나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지만, 른수의 엉뚱함과 엉성함이 얽힌 비논리적인 일상은 안정감과 몰입감을 동시에 줬다. 무엇보다 오직 성실과 노력이란 단일 툴로 겨우겨우 해내는 삶을 보는게 계속 른수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묘한 에너지를 얻고, 나의 서투름과 타인의 울퉁불퉁함에 너그러워졌다.
우리가 챗지피보다 못한 유일한 한가지는 대화가 휘발이 된다는 것이다. 챗지피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실시간 업데이트 되는 나와 른수. 마냥 좋게 업데이트 될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까. 사실 나랑 른수는 벌써 인생이 조금 재미 없어지고 있는거 같다. 혈기와 패기로 넘치면서 뭐든 해보고 대담하던 것과 달리 무료한게 인생이지 생각할 때도 많아졌고, 문학과 교양보다 매출과 부동산이 최고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먼 훗날 우리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시련은 더 자주 계속 찾아 올테니, 지금의 신선하고 무모한데다 솔직한 대화를 화석화 하고 싶다. 마음속 아직 살아있는 문학소녀와 모험가가 아예 죽지 않은 지금. 감히 챗 지피티는 넘볼수 없는 울퉁불퉁하고 비논리적인 대화를 박제하고 싶다. 그래서 아무리 큰 시련이 와도 다시 이 대화를 보며 서툴고 부족한 우리를 이해하고, 인간답게 다시 일어나서 살았으면 한다. 그게 이 뉴스레터의 시작이자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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