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 이 글쓰기의 목적은 필사 문장을 다시 음미하고 확장하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 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일기 <황정은>
하루를 마치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무심코 켠 유튜브 속 알고리즘은, 어김없이 내 마음을 찔러 왔다.
- 결혼 전후 남편 변천사 - 화면 속 남자들의 얼굴은 젊은 시절과 결혼 후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호리호리하던 총각 시절은 온 데 간 데 없고, 결혼 후 몰라보게 변한 유부남들의 얼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댓글에는 절규가 흘렀다.
- 생판 모르는 남인데 왜 제가 그립죠?
- 배를 갈라서 구남친을 꺼내야 합니다.
- 사기 결혼이다. 어서 구남친과 재회하세요.
웃다 문득 움찔했다. ‘저 화면 속 인물들, 낯설지가 않은데… 우리 집 거실에도 한 명 있잖아.’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키 178cm에 몸무게 65kg이었다. 날렵한 턱선과 매끈한 몸매를 지닌 남자였다. 그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들떴다. 팔짱을 끼고 걸을 때면 괜히 허리를 펴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빼짝 말라 늘 한약을 지어 먹이셨다고 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마르면 보기 싫을 거라며 걱정을 토로하셨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분명 10kg 정도는 찔 테니까요.’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날부터 나는 남편을 사육하기로 한 것이다.
결혼 5년 차, 남편의 몸무게는 딱 10kg가 늘었다. 시어머님은 매우 흡족해하시며 "딱 지금처럼 유지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다. 물론 내 바람도 어머님과 같았다. 하지만 그 맘 때 시댁에서 앨범을 뒤지다 발견한 군대 시절 사진 속 남편은, 웃통을 벗고 선명한 복근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흔들며 물었다.
“우와~ 이 복근, 실제로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걱정 마. 마흔 되기 전에 꼭 보여줄게. 딱 기다려봐.”
말만 요란했다. 현실 속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드라마와 예능을 번갈아 보며 깔깔 웃어댔다. 수북이 쌓인 간식 봉지를 보고 내가 도끼눈을 떠도 그의 태도는 태연했다. 나는 출산 후 불어난 살을 빼려고 하루만 보 넘게 걸으며 함께 하자고 졸랐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아직은 나 봐줄 만하잖아?”
결혼 초반, 함께 산책하며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남편은 이제 편의점 신상 과자 코너를 더 즐겼다. 운동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하면, 그는 갑자기 다리가 아팠고, 허리가 뻐근했으며, 없던 두통까지 생겼다. 두 겹으로 접힌 남편의 턱살을 보며 '이걸 바란게 아냐' 스스로를 탓했다. 사육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식단을 신경 써도 헛수고였다. 회사에서 먹는 밥과 간식이 문제인 듯 보였지만, 그를 믿고 싶었다. 내가 임신 소식을 전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금연을 해낸 남자 아니었던가.
안타깝게도 결혼 10년 차가 넘어서자 남편의 몸무게는 어느새 25kg이나 늘어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는 마치 두꺼비를 연상케 했고, 내장 사이사이 가득할 지방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흔이 된 남편은 몇 주간 입맛이 없다며 평소 먹던 양을 확 줄였다. 드디어 다이어트를 결심한 걸까 내심 설레었다. 그런데 그는 마흔 번째 생일날 복근 대신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친척들 중에 고혈압으로 세상을 일찍 떠나거나 투병 중인 분이 계셨기에 나는 봉투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렸다. 울먹거리는 내 얼굴을 보며 남편은 담담했다. “이젠 나이도 있고, 어쩔 수 없잖아. 약 잘 챙겨 먹으면서 관리하면 돼.”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사실 사육자인 내 책임이 컸다. 음식이 아닌 사랑을 먹였어야 했는데 이건 정녕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나 역시 손가락 재수술 후 6개월간 운동 없이 보내면서, 걷기 앱에 매일 7천에서 만보를 찍던 내가 어느 순간 하루 1,000 보도 채 걷지 않았다. 힘들게 감량한 15kg은 어느덧 10kg이나 도로 불어 있었다. 체중계 위에서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같이 운동하자. 이건 아니야.”
나는 실내 자전거에 올랐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30km를 인터벌과 페달링을 하며 발을 굴렸다. 40분에서 1시간 신나게 달리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남편은 나를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당신이 8kg 빼면, 나도 시작할게. 구남친 보고 싶으면 열심히 해. 까짓 껏 우리 내기하자.”
그는 여전히 장난처럼 말했지만 내 마음은 절실했다. 사랑은 결국 서로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니까. 오늘로 36일째, 나는 4kg을 감량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나는 독한 구석이 있는 여자다. 목표를 정했으니 보남편 보란 듯이 이번 다이어트에 성공할 테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내 성공이 조금 천천히 오길 바라는 눈치다. 체중계에 오른 내가 내려오자 냉큼 올라가 자기 몸무게를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갑자기 안 하던 스쾃를 시작한다. 두세 번 하고 헉헉거리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놀라운 진전이다. 주방에는 달걀 삶는 냄새가 풍긴다.
거울 앞에서 허리를 다시 곧게 펴 본다. 땀에 젖은 운동복 차림이지만, 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 무엇보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둘이 함께 변해갈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바란다는 건, 결국 행동하는 일이다. 기다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손과 발을 써서 그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희망은 근육처럼 단단해진다는 것을 믿는다. 요즘 나는 현남편이 잡아먹힌 구남친을 꺼내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날씬해진 그의 품에 다시 안길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가슴이 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운동하자, 페달 밟자, 달걀 삶자! 나는 반드시 구남친을 구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