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gancia Apr 06. 2023

도서관으로 배달된 편지.

짧게 쓴 소설.

예년보다 열흘 빨리 개화한 벚나무는 비가 만든 웅덩이에도 꽃을 피웠다. 물에 젖은 잎들이 까만 구두에 자꾸 달라붙었지만 인도를 밟는 굽소리는 일정했다. "또각또각" 300m 가로수 길을 홀로 걸었다. 주말 아침, 봄비, 꽃샘추위. 이 절묘한 삼박자가 사람들을 이불속에서 탈출시키지 못한 탓 이리다. 썩 나쁘지 않은 출근길 풍경을 오래오래 눈에 담고 싶었다. 하지만 걸어서 10분 거리인 근무지. '지난주처럼 바쁘지 않아야 할 텐데...' 주문을 외우며 도서관 입구에서 빨간 우산을 접었다.



1층 갤러리와 스터디룸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안내 데스크 속에 앉아있던 인철과 눈인사를 나눈 후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 종합자료실과 디지털 자료실을 지나면 4평 남짓 사무실이 나온다. 보통 이곳에서 기획, 홍보, 모집, 행사 같은 크고 작은 일을 협의한다. 5개월 차가 되니 어느 정도 사서 일이 익숙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사무실 문을 열면 숨이 턱 막힌다. 오늘은 회의가 없어 다행이다 생각하며 문을 닫았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3층에 있다. 바로 열람실.



단지 책 내음이 좋아 선택한 직업이었다. 어떤 성보다 견고하게 나를 둘러싼 책들이 든든했다. 새로 들어온 책의 번호를 붙이는 일, 가득 쌓인 책수레를 이리 거리 끌며 책을 자기 집으로 귀가시키는 일, 그러다 손길이 닿지 않는 죽은 책들에게 눈길을 주는 일, "띡띡" 도서 대출과 반납을 받는 일. 비록 차갑고 딱딱한 책이 손과 손들을 오갔지만 마음만은 클레이처럼 말랑말랑 거렸다.



"아인 씨, 누가 찾던데." 책들 틈 사이에서 서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인철의 귓속말에 화들짝 놀랐다. 1층으로 내려가보니 안내 데스크에는 낯선 사내가 도서관 입구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정 오리털 파카, 돌돌 말린 목도리, 베이지 톤 면바지 끝단이 비에 젖어 두꺼운 옷차림에도 추워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 든 3단 우산은 몸을 축 늘어뜨려 도서관 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을까요? 제가 김아인인데요." 남자는 내 눈에서 목으로 시선을 내리더니 이름표를 확인하고서야 가방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부탁을 하셔서요." 그가 하얀 봉투를 꺼내며 "편지입니다."라고 말했다. 봉투 앞에 선명히 적인 내 이름 석 자에 상장을 받듯 두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엔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남자는 눈물을 털어내듯 우산을 바닥에 툭툭 털고 내가 더 묻기도 전에 도서관을 나가버렸다.




이 편지가 언제 주인을 찾아가게 될지 기약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용기 내어 펜을 잡았습니다.

지난해 아침부터 내린 가을비에 정처 없이 걷다 도서관에 처음 발을 들였지요. 비에 젖은 우산을 들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3층 열람실까지 올라갔습니다. 김아인 씨는 그때 처음 뵌 분이었어요. 제게 인사를 하더니 손에서 우산을 가지고 1층에 으레 뛰어내려 가셨지요. 얼마 후 우산을 투명 비닐에 넣어 "여기 있어요" 저에게 웃으며 주시더군요. 그 모습이 참 고마워 직원분의 성함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책을 사랑했습니다. 좁은 아파트에 쌓인 책들 때문에 주택으로 이사할 정도였으니까요. 약 만권의 책들이 가득한 방에서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고 감았습니다. 책이 지켜주는 커다란 성벽 안에서 우리는 짧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요. 1년 전 아내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로 지내는 저를 아들은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두고 온 책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깊은 상실감 때문인지 저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젠 아쉽게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을 자주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을 정리하기에 도서관만큼 좋은 곳이 또 있을까요? 아내와 제가 좋아했던 책들을 찾아 읽으며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앉던 자리가 공원이 잘 보여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을 텐데 항상 비어있었지요. 그 또한 사서님의 배려인 것을 저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원에 벚꽃이 만개했겠지요. 흩날리는 꽃을 볼 수 없다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드는군요.

매일 죽음이 저를 향해 다가오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루빨리 아내 곁으로 가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사서님 이야기를 하면 아내도 무척 감사해할 것 같습니다. 사실 아내는 저를 떠나기 전 그곳에 도서관을 만들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제가 도착하면 이미 다 완공되었겠지요. 저는 이제 아내가 만들어 놓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려 합니다. 김아인 사서님 감사합니다. 비록 직접 뵙고 감사함을 전하지 못하지만 두서없는 글이나마 남기고 싶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 예순일곱 번째 겨울을 보내며 김** 올림.




편지를 다 읽을 때 즈음에서야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여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은 안전바를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시던 모습. 비닐에 우산을 넣어 드리자 고맙다고 말씀하시던 야윈 얼굴. 그분은 같은 자리에 앉아 책과 공원을 때때로 하늘을 번갈아 보셨다.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많이 아프셨구나.'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분의 아들이 만들고 간 빗물 위에 듣고 싶은 이야기와 묻지 못한 질문만 남았다.

* 내가 만약 도서관 사서가 된다면?  < 펠프스 여사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사람이었고, 남의 집 아이들 일에 간섭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마틸다 >


매거진의 이전글 기차를타고서... <단편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