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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리 Jan 21. 2022

IT 서비스 기획자 되지 말아요

서비스 기획자가 되는 것은 정말 최악일까


 영상은 한때 반짝 유행했던 <변호사 되지 말아요> 영상을 기획자라는 직업 맞게 현직자분께서 패러디한 것이다. 에이전시에서 근무하실  만든 영상 같아서 나의 입장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공감되어서 팀원들이랑 같이 보고 웃었던 (아니 울었던..) 기억이 있다.



과연 최악 일지.. 현직 인하우스 서비스 기획자의 입장에서 영상을 한 번 가볍게 뜯어보았다.


*너무 진지하게 봐주진 마시고 재미로 읽어주세요 :)








직급 없고

: 없음. 이건 뭐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여기는 최소한의 팀 단위 관리를 위한 직급만 존재한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IT 업계는 직급 없는 곳이 꽤 많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런 디테일한 직급)


영어 이름 쓰냐고

: 쓰는 사람도 있고 안 쓰는 사람도 있고. 외국인과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편의상 영어 이름을 쓰는 분들도 많다. 내 한국 이름도 외국인이 읽기 굉장히 어려워하는 발음의 조합인데 처음부터 영어 이름으로  소통할 걸 하는 후회가 아주 조금 있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영어 이름을 썼다. "길동 대리님~", "길동님 ~" 보다 '님'자 없이 "피터 ~"라고 부르는 것이 좀 더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효과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나이 한참 많은 개발자분을 '피터'라고 '님'이라는 높임 표현 없이 부르는 것이 유교걸로서 상당히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진다. 그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분들은 사석에서도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편하다. (부작용 : 본명을 종종 까먹음)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 이건 맞다. 아니 적어도 이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뇌피셜로 막 기획했다가는 다른 파트 멤버들에게 논리로 후드려 맞는다.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 기획자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 관리 안 하면 사고 난다. 굴러가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로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하기 싫어도 주도적으로 해야 되고 그렇게 하게 된다.


혁신적인 서비스를 기획

: 안타깝게도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한다고 해서 혁신적인 서비스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회사에서 만드는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통계적으로) 혁신적이지 않다. 정말 극히 일부의 서비스만이 '혁신'이다. 나머지는 그 혁신을 따라가는 후발 주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개고생하고

: 맞긴 하는데 이건 기획뿐만 아니라 다른 파트들도 다 같이 개고생 한다. 각자 개고생의 결이 좀 다를 뿐, 다 똑같이 힘들고 고생한다. 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니까 서로서로 이해하면서 일하는 거지 뭐...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줄

: 개고생하고 투명인간..? 사실 이건 잘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직무 직급 상관없이 일반 회사원은 다 투명인간이지 않나?(극단적) 내 사업하는 거 아니고 임원급 아니면 다 투명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편.


"오 이거 사용성 엄청 좋아졌네? 이거 기획/개발 한 사람 어느 팀의 누구야?"라고 물어보는 일반 사용자 없잖아요? 서비스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인 스포트라잇은 위에 계신 분들이 받게 되는 것이 회사. (회사원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래도 뭐 긍정적인 얘기 하나 던지자면 요즘은 기획자가 PM 역할을 많이 가져가는 추세이기도 해서 단순 잡무 처리하는 직업이다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기획자는 서비스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분명히 필요하고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멤버이다.




몇 명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아나요?

: 지금 한 번 대충 세어봤는데 최소 6명에서 8명. 네. 뭐 하나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우리도 그걸 빨리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거

: 그런 거는 없다. 근데 이건 뭐 당연하다. 서비스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다른 파트들과 협업해서 만들어가는 것이고 또 그들의 리소스가 들어가는 일이니까. 나의 생각 없는 사소한 결정에 따라 누군가는 일을 2배로 하게 될 수도 있다. 번거롭더라도 무엇이든 협의해서 결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최소 6명에서 8명의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업무 하면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아닐까? 저 문장 그대로 사내 메신저에 검색해보면 꽤 많은 검색 결과 수가 나올 것이다.


- 로 커뮤니케이션을 멈추는 것

: 이거 자막 다신 분 진짜 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일단 확인해보겠다고 하고 메신저 핑퐁을 멈춘 다음에 상황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난감한 요구사항이 맥락 없이 들어올 때에는 그걸 다 그 자리에서 바로 대응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끊어내고 무슨 상황인지 다른 경로로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무턱대고 받아치려고 하기보다는 생각을 좀 정리하고,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대응해도 늦지 않다.




잘못한 것처럼 부탁하고 다니기

: 팩트입니다. 분명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내가 죄인이 되는 것 같은 상황은 정말 정말 많이 겪었다.


예상치 못한 일, 제삼자의 개입, 타이밍을 잘못 찾아온 뒤늦은 피드백 등 기획에서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요소 때문에 이미 결정되었던 사항을 바꿔야 하는 경우는 종종 존재한다. (아 물론 명백히 내가 잘못한 때도 있기는 하다.) 그럴 때마다 죄인 모드로 여기저기 변경 사항을 공유하고 그에 맞게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기획자가 해야 하는 일.


매번 새로운 요소들에 의해 이런 일이 생기기 때문에 방지하는 것도 어렵다. 그냥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정신줄 잡고 빠르게 교통정리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입사 초반엔 이거 때문에 제일 퇴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내가 바꾸고 싶어서 바꾸는 게 아닌, 내 잘못이 아닌) 수정 사항을 전달했을 때 상대방의 난감해하는 반응을 마주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하지만 요즘은? '응 ~ 어쩔 수 없어 ~ 내 잘못 아니야~'라고 생각하면서 내 탓하지 않는 노력을 한다. 내 정신건강과 자존감은 내가 지킨다.




수정사항 물어다 주는 부엉이

: 기획 업무의 8할은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엉이 숙명이다. 근데 가끔 내가 진짜 부엉이인가? 싶다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굳이 나를 거치치 않고 담당 파트에 바로 문의해도 되는 것을 굳이 굳이 기획에게 와서 이것 좀 확인해달라고 부탁하는 거..? (백번 생각해봐도 본인이 직접 담당자에게 물어보기 부끄럽거나 불편해서 나한테 대신 물어봐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음.)


'그래, 그냥 착한 부엉이인 내가 대신 물어봐주지 뭐 ~'라고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다.




친구들 설문 응답으로

: 서베이는 전문 리서쳐들에게 의뢰한다.


그럴듯한 인사이트

: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인사이트까지 아주 잘 뽑아주신다. 그렇게 도출된 인사이트를 갖고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말이 되게, 예쁘게 기획서를 쓰고 남을 설득하는 것은 기획자의 몫.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기획자는 진짜 글을 잘 쓰고 말을 잘해야 되는 직무인 것 같다. 같은 기능도 어떻게 그 의도를 설명하고 문서를 어떻게 작성하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또 종종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뜯어보고 비교하고 분석해서 그럴듯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언어 능력이 아주아주 중요한 직무. (하지만 난 요즘 말하기 능력이 퇴보 중이지...)




그렇게 안 나와요. 나중에 다 바뀌어요.

: 이것도 팩트. 원대하고 장황하게 기획서를 작성하지만 결국 나중에 릴리즈 되는 것은 팔다리 다 잘린 내 새끼. 하지만 최소한의 스펙으로 빠르게 내보내고 유저 반응을 살펴보면서 더 개선한다는 점에서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00을 기획했을 때 70 정도로만 실제 릴리즈가 되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서는 오히려 내가 '아 이거 꼭 필요한가?', '이거 없어도 되지 않나?'식으로 다소 보수적이고 효율적인 접근 방식으로 기획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유저에게 최대의 편의성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획

vs 빠르게 실행하여 검증할 수 있는 수준의 기획


개념적으로 양립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검증해나가면서 유저에게 최대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기능으로 개선해나가면 되니까. 이러한 방식이 좋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모두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회사에서는 '빠르게 검증'이 어려울 때가 많다.


또한 여러모로 스펙을 덜어낸 Phase 1으로 한 번 릴리즈 되면 그대로 끝인 경우도 많다. 'Phase 2 란 그냥 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하다'는 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실무 하는 입장에선 두 가지 방향에 대해서 적절하게 밸런스를 맞춰가며 기획해야 되는 것 같다. 어렵다 어려워.




런칭되면 뿌듯하지 않나요

: 런칭되면 당연히 뿌듯하다. 그런데 애초에 서비스 런칭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은 어렵다. 매번 신규 서비스를 기획하고 런칭하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 봤을 때에 티도 안나는 자잘한 기능 개선, 로직 개선, 버그 수정과 같은 업무가 솔직히 더 많다. 때문에 대학교 과제처럼 막 사용자 분석, 시장분석해서 까리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이 기획자의 주된 업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현실과 많이 다르다.


일반적인 기능들이 릴리즈 될 때는 마음의 짐 15,649개 중에서 1개 정도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의 감정이 더 크다. 그리고 런칭됐을 때 보다 서비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우연히 지하철에서 내가 만든 서비스를 쓰고 있는 사람을 목격한다거나, 앱스토어나 SNS에서 서비스를 추천하는 글을 볼 때 더 뿌듯하고 '아 내가 인생을 헛으로 살진 않았구나'하는 기분이 든다.




기획자 되지 말아요

: 하고 싶으면 하세요. 일단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얼른 발 빼서 다른 데로 도망가면 되니까? 딱히 적극적으로 말리고 싶을 정도로 단점이 많은 직업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일하면서 지구 다 뿌수고 인구 절반 날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날 때도 많지만 그건 보통 그냥 개인의 문제이다. (그 사람이 이상한거지 직업적 특성에 기인하는 스트레스와 분노는 아니다.)




나는 원래 마케터 커리어를 밟다가 기획자로 전향한 케이스인데 딱히 후회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스트레스는 마케팅 업무 할 때 보다 지금이 훨씬 X100 더 많이 받는데 이상하게 이 업무가 적성에는 더 맞는 것 같다.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스스로를 세뇌시킨 걸까? (그런 거 같다.)




모든 직장인들 화이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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