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은 2021년 6월 15일 오전에 수정되었습니다. 이전의 포스팅을 퍼가신 분이 있다면 삭제 부탁드립니다.
필자의 아기가 처음 태어난 날, 아기가 제대로 울지 못해 신생아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아기의 몸에 핏자국이 닦이지도 않은 채로 온갖 모니터링 기기를 붙이고 기관삽관까지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자못 안 쓰러웠다. 하지만 의사로서 알고 있었다. 저런 모니터링 기기들이 반드시 필요하고, 기관삽관이 반드시 필요하고, 부모에게서 떼어놓아 집중적으로 바이탈 사인을 몇 십분마다 체크하고 이런 체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살아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의학은 과학이고 그 판단에는 반드시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있어야 한다.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 방법들이 현재로서는 그런 비침습적/침습적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의학을 배우지 않은 일반인이 이런 아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매우 안타깝고 심하면 저렇게 아기에게 수 많은 장치를 붙이는 현대 의학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저런 시스템 안에서 케어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사실 이 글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좀 더 전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 시스템 vs non-시스템의 대결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시스템은 굉장히 중요하다. 시스템이란 말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데, 꼭 물리적 실체라기 보다는 어떤 절차나 프로세스가 제도화되어 한 사회에 견고하게 셋팅되어 있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 system은 그 사회에서 엄청나게 오랜 세월의 풍파와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남은 것이기에, 오래된 system일수록 오류의 가능성이 적고, 사회가 원하는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다. 우리 사회의 system 중에 하나는 사법 system이다. 또 의료 system도 있고, 선거 system도 있으며, 학교 교육도 교육 system이다. system은 한 사회를 지탱하는데 너무나 중요하고, 이 system 은 한 국가의 건국 이후로 계속해서 사회변화에 따라 발전하고 형태를 바꾼다. (정치 system은 마지막에 민주주의로 왔다.)
시스템은 사회의 다른 면들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워낙에 엮여있는 부분이 많기에 임의로 개인이 바꾸거나 조정이 불가능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 개인이 어느 사회에서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system을 믿고 살라고 하겠다. 필자의 지도교수이신 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님은 이 system 개념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심지어 퇴임 기념 강연도 '보건학을 system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강의하신다.
종종 사람들은 non-system을 추종하는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연주의' 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마케팅 되곤 한다. 하지만 환경보건학을 전공한 필자의 입장에서는 '자연주의'라는 이름 하에 과학을 거부하는 것은 대중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쌓아올려진 하나의 시스템이고 하나의 논문이, 하나의 가설이 승인되고 인정받는데는 학술논문에서 학자들간의 오랜 토론과 논박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즉 아무리 공격해도 더 이상 공격할 게 없을 때에야 진리로 인정받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논문 마지막 리비전이 끝나면 에디터가 congratulation! 이라고 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자연이 정말 건강/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면 이는 과학이란 방법론으로 데이터를 이용하여 엄밀하게 증명되어야 한다. 증명되지 않은 intervention은 진정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이 좀 더 경각심을 갖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또 시스템의 다른 한 가지 장점으로 인력 양성의 측면을 들고 싶다. 인력 양성의 측면에서 system 안에서 교육받은 것과 system 밖에서 교육받은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물론 system 안에서 교육을 받으면 경우에 따라 비효율적이거나 실전 경험을 해봐야 아는 것들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더 중요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system 안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대답하겠다. 결국에 교육 받아야 하는 것을 다 받게 되며 (좋든 싫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국가에서 정해놓은 system에 따라 다 해내야 한다. 그렇게 비워진 부분이 채워지면서 한 명의 전문인력이 양성되는 것이다.
의료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다. 필자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소송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도 법률적 일에 대해서는 변호사를 찾아갈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연구했다고 해봤자 그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아는 지식의 1/10 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싸움꾼이 싸움을 잘해도 프로복서 앞에서는 상대가 안 된다. 마피아나 야쿠자의 세력이 강성해도 총으로 정식 무장한 군인을 보유한 국가 앞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System 의 세례를 받은 것과 안 받은 것은 천지차이란 말이다.
우리 개개인은 크고 작은 여러 system 속의 존재고, system 안에서 function을 할 때에 원활히 제 기능을 하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마지막 한 가지는 system 안에 있을 때에야 리스크 관리가 된다는 것이다. System의 진정한 위력은 리스크 관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스템 밖에 있으면 일시적으로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결국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리스크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그 안에 리스크가 잠복해 있으며, 이 리스크가 제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system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이 현대사회 문명인으로서의 세례이자 축복이다. 이 시스템적 사고는 어쩌면 직업환경의학이란 학문의 근간이자, 보건학적 논의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추후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기회가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