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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Jul 06. 2020

택리지 (擇里志)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아 나선 30년

택리지가 쓰이게 된 배경

조선의 양반 계층은 지배층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만들 책임이 있었다. 1392년에 조선이 세워지고 나라의 이념으로 유학을 채택하면서 고려 말부터 신진 사대부(士大夫)라 불리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이성계를 조선의 태조로 옹립하면서 같은 사대부라도 뜻이 맞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고려 말에 절개를 지킨 고려삼은(高麗三隱)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는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개국 공신들의 스승이었지만 이들 또한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라는 명목 하에 죽임을 당했다. 고려 시대 권문세족의 횡포를 보다 못해 새로운 세상을 열려했던 사대부들이지만, 그들 또한 조선 초기부터 내부적으로 분열되었으며 외척이 정권을 잡은 세도정치가 있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무고한 피를 흘려왔다.

조선 당쟁의 역사 (출처: https://blutom.tistory.com)

조선 초반부터 이어진 사대부들의 대립은 선조 재임기간 훈구파・사림파부터 시작해 남인・서인・북인・동인으로 대립하는 파란만장한 역사로 이어졌다. <택리지>가 쓰인 17세기 중반은 영조가 집권한 시기로, 숙종 시대 무수한 사화를 지난 뒤 승리한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병조정랑 (兵曹正郞)까지 이르는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이 죽고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신임옥사 (辛壬獄事, 노론이 당시 왕이었던 경종을 살해하고 연잉군을 옹립한다고 고변한 사건)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혹독한 취조를 네 차례 받고 먼 지역으로 귀양을 갔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으며, 이후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30년 동안 조선 전국을 돌며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택리지>는 이런 방랑 생활의 결과로 나온 책이다.


<택리지>는 단순한 지리서가 아니다!

조선의 역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은 <택리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택리지>를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택리지>가 단지 조선 시대 지방의 지리적 특성에 대해 설명한 지루한 책이라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택리지>는 1752년 출간된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었다. 책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시의 생활상을 감안해보면 <택리지>가 조선에 일으킨 반향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다. 이중환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택리지>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중환은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택(擇) 하기 위해 책을 썼다. 그는 사민총론・팔도총론・복거총론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에 대해 논의했다. 사민총론에서 사대부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며, 팔도총론에서 조선 팔도에 대해 묘사한 뒤, 복거총론에서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땅이 과연 사대부가 살 곳이라고 주장한다.


사민총론에서 이중환은 사대부는 가정을 꾸리고 생업을 마련해,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거느리며, 집안을 온전하게 보호해 유지할 계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며, 지역에도 좋고 나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 팔도를 상세히 묘사한 <대동여지도>

팔도총론은 압록강과 두만강 아래가 조선 땅이 된 수천 년의 역사를 요약하고 조선을 이루는 팔도 각각에 대해 설명한다. 조선 팔도는 '임금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경기도(京畿道)를 제외하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하고 번창한 두 개의 도시에서 각 한 글자를 따와 이름이 붙여졌다. 평안도(平安道)는 평양과 안주, 함경도(咸鏡道)함흥과 경성, 황해도(黃海道)는 황주와 해주, 강원도(江原道)는 강릉과 원주, 경상도(慶尙道)는 경주와 상주, 전라도(全羅道)는 전주와 나주, 충청도(忠淸道)는 충주와 청주에서 따 온 것이다. 이중환은 부(府)・목(牧)・군(郡)・현(縣)으로 나누어진 조선의 행정구역에서 특히 중요한 부와 목을 중심으로 각 지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은 조선의 지리서임에도 불구하고, 이북 3도인 평안도・함경도・황해도에 대한 내용이 극히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중환이 실제로 가보지 않은 곳은 황해도와 전라도지만, 전라도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 것과 달리 황해도는 짧게 서술하고 있었다. 이는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그를 도운 공신들 가운데 서북 출신의 맹장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계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을 경계해 '서북 사람을 높이 쓰지 말라'는 명령을 남겼으며, 평안・함경 두 도에는 300년 동안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가 없게 되었고, 사대부들도 그곳에 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은 이중환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단지 조선 팔도의 행정구역으로서 그 지역의 특징에 대해서 열거한 것뿐이다.


이중환이 특별히 관심을 가진 지역은 경기도를 비롯한 남쪽의 다섯 개 행정구역이다. 이북 3도가 조선시대 새로 개척하면서 신라 이후 처음으로 회복한 땅이라 서술할 만한 역사적인 사실이 없는 반면, 통일 신라 이후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지역과 연관시켜 설명하기에 좋기 때문이었다. 남한산성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유적, 명승으로 손꼽히는 금강산, 이순신이 왜적을 무찌른 명량 등이 남쪽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 를 가진 남쪽 지방이 벼농사가 쉽고 특산물이 다양해 살기 좋은 땅임이 명백하므로 이중환 또한 남쪽 지방에 치우쳐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두대간

현재도 팔도 대신 지방을 구분하는 데 사용하는 명칭인 영동・영서・영남・호남・호서의 어원도 설명하고 있다. 영(嶺)은 백두대간에서 산줄기가 조금 나지막해지고 평평해지는 곳을 말한다. 대관령, 추풍령, 죽령 등이 이런 고개이며,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를 중심으로 영동・영서・영남으로 나뉘는 것이다. 호남과 호서를 구분하는 방법은 호수 남쪽과 서쪽을 정하는 것이며, 호(湖)는 충북 제천의 의림지를 말한다.


이중환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복거총론 (卜居總論)>

무릇 살 터를 잡는 데는 지리가 으뜸이고, 다음으로 생리가 좋아야 하며, 인심이 좋아야 하고, 아름다운 산과 물이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없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택리지>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마지막 장인 복거총론이다. 복거총론은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가 모두 좋은 곳이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이라 평가한다. 이중환이 바라보는 지리는 농업이 근간이 된 조선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지리를 논할 것인가. 먼저 수구를 보고, 그다음에는 들판의 형세를 본다. 그다음에 산의 모양을 보고, 그다음에 흙의 빛깔을 본다. 그다음에 수리를 보고, 그다음에 조산과 조수를 본다." 사대부 또한 예를 차리기 전에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재해에 쉽게 대비할 수 있고 논농사가 잘 되는 곳을 먼저 따진 뒤에야 음양의 이치를 따진다. 조선이 수도를 정할 때 기초를 한 풍수지리설 대신 취락 입지 조건이 되는 곳을 더 으뜸으로 친 것을 알 수 있다. 이중환의 실용적인 사상은 바로 다음 조건인 생리에서 더 잘 드러난다.

조선 시대 지도를 보고 지리가 좋았던 장소를 물색할 수 있다

생리를 말하기 전에 이중환은 인간의 단순한 이치에 대해 말한다. "무릇 세상 사람들이 헛된 이름에만 힘을 쓰고, 실제를 버린  오래되었다.  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하기 때문에, 남몰래 악한 짓을 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먼저 의식의 원천이 되는 일에 힘쓰고,  뒤에 예의의 단서를 다스린다' 말은 사람에게 악한 일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도록 하자는 뜻이다." 이중환은 자신의 실용적인 사상을 강조하면서 재물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자를 보내는  모두 재물이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이 기름진 곳이 으뜸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꿀  있는 돗이 그다음이다." 그는 조선에서 가장 기름진 땅으로 전라도의 남원・구례, 경상도의 성주・진주를 꼽으면서 논농사가  되는 곳뿐만 아니라 목화 재배가  되는 곳과 물자가 모여들어 장사가  되는 지역,  생리가 좋은 장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중환은 맹모삼천지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속이 올바른 곳을 가리지 않으면 자신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자손들도 반드시 나쁜 물이 들어서 그르치게 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살 터를 잡을 때는 그 지방의 풍속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지방에 대한 편견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으로, 팔도 가운데 인심이 순박하고 두텁기로 으뜸인 곳을 평안도로 꼽는다. 그다음으로 경상도를 풍속이 질박하고 진실하다고 높게 평가한다.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한 짓을 좋아해 올바르지 않은 일에도 쉽게 움직인다고 평가하며, 충청도는 권세와 이익만 좇는다고 말하는 등 나머지 도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이후 이중환은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에 의한 당쟁이 생긴 이유와 이로 인한 폐해에 대해 설명한다. 동인과 서인은 대립하던 김효원의 집이 동쪽,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며, 남인과 북인은 남인의 중심이 영남지방, 북인의 중심이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당쟁에서 최종 승리하게 된 건 서인이지만 서인 또한 남인 숙청에 대한 태도에 따라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이중환은 백성들의 삶을 뒤로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당쟁만 벌인 당시 양반들에 대해 한탄하지만 영조 시대에 탕평책을 펼치면서 300년 된 전통인 이조낭관을 없앤 것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한다.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기나 긴 당쟁이 끝나게 된다

현재 조정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하던 이중환은 다시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으며 당파로 나뉜 사대부의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사대부의 성품이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높은지 낮은지 하는 것은 오직 자기 패거리 같은 색목에게만 통할뿐이지, 다른 색목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사대부는 인심이 아니라 같은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대부가 없는 곳을 가려서 문을 닫고 교제를 끊으며,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보다 못하다. 그렇게만 되면 비록 농사꾼이 되거나 장인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어도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인심이 좋은지 나쁜 지도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중환이 산수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현대인들이 조망권이 있는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는 산수가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산수를 평하기 전에 조선의 영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수는 어떻게 논하는가. 백두산은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으면서, 온 나라의 지붕이 되어 있다. 산 위에 커다란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다.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이 되었으며,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 되었다.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바로 우리나라다." 백두대간에 대해 말하면서 조선에서 명산과 명수로 꼽히는 곳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금강산을 제일명산으로 꼽으면서 대한민국에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부분의 산을 명산으로 평가한다. 영동지방의 삼일포・경포대・죽서루 등에 대해 말하면서 한반도에서 산수의 경치가 가장 훌륭한 곳으로 강원도 영동을 첫째로 꼽는다. 영춘・단양・청풍・제천 충청도 네 군의 산수 또한 빼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럼 사대부가 가장 살 만한 곳은 어디인가

이중환은 30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가장 살 만한 곳을 찾고자 했지만 결국 그 답을 얻지는 못 했다. 그는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이 글도 살 만한 곳을 고르려고 해도 살 만한 곳이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넓게 보는 사람은 문자 밖에서 (참뜻을)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중환이 이와 같이 말한 건 조정에서 떠나 농・공・상의 신분인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면서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남과 접촉하면 친하거나 멀어지는 것이 생기고, 친하거나 멀어지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도 생긴다. 친하고 좋아하면 어울리고 합치게 되며, 멀어지고 미워하면 떨어지고 배반하게 된다. 한 번 어울리거나 배반했다는 지목을 받거나 떨어지거나 합쳤다는 말을 듣게 되면 문득 한계가 생겨, 저쪽에서도 들어올 수가 없고 이쪽에서도 역시 들어갈 수 없다." 그는 사대부들이 만든 폐단 때문인지 인간의 본성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딜 가든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생겨 갈등 속에 살 수밖에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중환이 열거한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를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농업이 중심인 조선 사회와 달리 대한민국은 첨단 산업이 중심이며,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풍수지리설의 자리를 자연을 개발하여 인간이 중심이 된 서구 사상이 대체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고 사는 것도 아닌데 지리가 좋아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개인이 중심이 되어 옆집사람과 인사도 잘 나누지 않는 아파트에 사는 우리에게 인심이 중요할까. 맘만 먹으면 먼 해외로 떠날 수 있는 지금 산수가 나쁜 들 어떠하랴. 다만 먹고사는 입장에서 직장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생리란 여전히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살 만한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리지>의 마지막 결론은 현대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당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서로를 배척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좌절한 적은 없는가.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으로 묶이기 싫다며 반발하는 사람들, 동료와의 갈등으로 우울증을 앓고 자살하는 사람들 등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의 핵심은 모두 이중환이 지적한 폐단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사회적 동물이기에 서로 배척하는 집단에 속하기를 원하고 평생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살 만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가질 수 있는 도시면 충분한 것일까. <택리지>를 다 읽어도 나 또한 이중환처럼 아무 답을 내지 못하고 머릿속이 혼란해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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