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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슬펐던 이유

2023.5.12(금)

by 박달나무

어제 슬픈날이라는 포스팅에 <해명>의 의무를 느낀다.


사실 다음날 또는 다다음날 해명할 생각으로 슬픈날 제목를 달았다.


바로 해명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마침 우리 팀 중 나를 제외한 세 명 모두 열감기로 걷기가 잠시 중단됐기에,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아이들과 여자 선생님은 내내 잔다. 어젯밤 오한과 몸살로 거의 못잤기 때문)



나의 고민은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기술이 처방이다; Description is Prescription>처럼 직접적인 대안을 말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건져올리는 문제제기는 집단의 지혜를 동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글의 동기는 순례길을 같이 걷는 아이들이 제공하지만, 나에게는 오래된 고민이었다)


내가 슬픈 이유는 나의 무지 때문이다. 종종 ‘인지’라고 생각했으나 ‘무지’한 경우를 확인했을 때 슬퍼진다.


어제가 그랬다.



마침 참고가 될 만한 오은영 박사 영상이 있어서 붙인다. <금쪽 같은 내 새끼>는 분류상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다. 편집의 장난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잘 보면 <보인다> 새로운 인류학을 위한 씨앗이 들어있다. 그건 오은영 박사나 제작진과 무관하다.



일단 아이들은 <지식>에서 ‘지’와 ‘식’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둘 다 <안다>와 관련있지만, ‘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고, ‘지’는 저절로 아는 것이다. ‘지’는 세상에 태어나 마을에서 살다보면(심지어 늑대인간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과 같이 산다면) 모를 수 없는 기본적 룰이다. 일상 언어의 구사, 부끄러움, 측은지심, 독점을 용인하지 않는 규칙, 배려심, 어른에 대한 공경 등이 ‘지’에 속한다. 학습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집단생활을 통해 저절로 학습된다. ‘식’은 학습이라도 다른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지’의 영역에서 <무지하다>고 생각한 것이 슬픔의 배경이다.(얘기를 풀겠지만 결국 내가 생각한 아이들의 “무지”는 나의 “무지”로 인한 오판이었기에 슬펐다는 스토리)


오은영이 <사회적 의사소통장애>라고 표현한 발달장애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나타난다.


일단 아이들과 대화로 생각을 들어봤다. 일종의 토론이 됐다. 우리 아이들은 하나도 더듬지 않고 자기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는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심지어 반론을 위한 직유적/은유적/상징적 예시까지 적절하게 동원한다.


KakaoTalk_20230927_014034557.jpg 우리가 아침을 먹은 식당

호텔 뒷마당에서 우리 셋 만 자리가 마련됐고, 사위가 조용하고 아무도 우리 얘기를 듣지 못하는 상황이라 마음 편하게 얘기를 나눴다. 시작은 말이다.


아무리 대화해도 두 평행선은 수렴되지 않고 우주 끝까지 나란히 달린다.


자신의 어떤 언행도 타당한 이유가 있으니 상대방이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이 고칠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아래 영상의 예를 들어 말하자면, 러시아워에 차가 밀려서 화가 나는 건 도로를 확장하거나, 많은 차량이 도로로 나오지 못하도록 제도적 마련을 하지 않은 탓이지, 화가 나서 욕을 하는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우리 아이들은 진짜 이렇게 말한다)


“왜 나만 가지고 그러나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두 아이가 서로 다르지만, <사회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건 둘이 똑같다.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적으로 지적하고, 자신은 소통이 가능하다고, 소통을 잘 하고 있다고 꿋꿋이 주장한다.


어제의 1차 결론은,


’아….역시 문제가 심각하구나‘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내 판단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결과라는 걸. 늘 <생각은 입장의 반영>이란 걸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현실에서 자주 잊는다.


나는 작은아이가 큰소리로 울어버린다거나(주변에 사람이 있을 때만) 큰아이가 씩씩대며 불쾌한 비언어적 메시지를 날릴 때 매우매우 불편하다.(누구나 대부분 그렇다. 영상에 나오는 아이의 아빠처럼. 대응 수위는 다르지만)


그런데, 내가 왜 불편할까를 생각하지 못한다. 까미노 위에서 아이의 특정한 행동이 있을 때, 불편한 사람은 나 뿐이다. 지나가는 미국 아저씨, 프랑스 아줌마는 불편하지 않다. 우리 아이들은 외국인 순례꾼에게 언제나 격려 받고 칭찬 받는다. (까미노에서 아이의 존재가 경탄의 대상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미션이 있고, 아이를 동반해서 움직여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아이가 걷는 일과 관련 없은 행위를 하거나 걷는 걸 방해할 때 불편한 거다. 만약에 나도 미션과 의무에서 해방된다면 불편할 일이 없다.



언제나 관계의 역학에 따라 메시지는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 아이의 발성으로 메시지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신하는 <나 자신>이 메세지를 편집/수정하고 나서야 메시지로서 태어난다.


아이의 소스 제공은 당연하지만, 가공되지 않은 원천 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 내가 사후적 편집자라는 걸 잊었는가에 대한 한탄이 어제 컸다. 공부도 하고 경험도 많다고 생각하면서 수신자인 <나 자신>을 제거하고, 불편한 내 마음을 아이가 만든 것처럼 <또> 오해한 나의 무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존경하는 윤상원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된 내용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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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손석희가 뉴스브리핑에서 말해서 유명해진 파커 J 파머의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의 아래와 같은 구절이 통합교육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비통한 자들, 즉 마음이 부서진 자들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진보한다. 달리 말해 진보는 현상 유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들,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동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통한 자들, 즉 마음이 부서진 자들은 내 곁에 있는 두 아이다. 내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을 부서뜨린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것. 아이의 메시지를 <나 자신>이 편집함으로써 아이는 부서지기도 하고, 온전하기도 하다.


이건 “부모가 어찌어찌해서 아이가 영향을 받는다”는 오은영 박사의 말과 다른 차원이다.


아이의 발신을 편집 가공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이 <새로운 인류학>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사족을 달면, 내 말은 “모든 건 마음에 달렸다”류의 말도 아니며, “내탓이오”류의 자기위안도 아니다. 나를 보는 상대방의 눈을 내 눈이 보고 있다는 지각…


지금까지 내 눈을 내가 볼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살지 않았던가.



금쪽 같은 내 새끼 영상에 잠깐 나오는 학교 교실 상황에서 급우를 공격하는 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사회적의사소통장애가 있다는 아이를 공격하는 교실의 폭력은 영상에서 편집돼서 사라졌다.


모든 <마음이 부서진 아이들>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다. 더이상 <나와 너>가 부서지는 일을 막아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덕에 더 좋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단, 아이의 메시지를 <내>가 어떻게 편집하는냐에 따라서.


https://youtu.be/q_8u_vV3gQ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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