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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날

2023.5.11(목)

by 박달나무

16km 걷고 비야르멘테로(Villarmentero)작은 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까리온까지 가기엔 좀 멀다 싶어 중간을 잡은 것.


2018년에는 보아디야에서 프로미스타(Frómista) 거쳐 까리온(Carrión)까지 25km를 걸었고, 2019년에는 같은 코스를 걷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는 바람에 피신한 곳이 오늘 묵는 마을의 허름한 알베르게였다. 그때 기억이 좋았다.(허름한 알베르게의 빠에야와 우연히 만난 리투아니아 청년의 기억)


그러나 오늘 묵는 숙소는 2019년의 허름한 알베르게가 아닌 길건너에 있는 2성급 농촌형 호텔(hotel rural)이다.


저녁밥이 맛없다. ㅠ (아이들이 먹지 않아 내가 포식했다)


두 아이 모두 신체 컨디션이 좋지 않다. (감기 기운이 있다. 여자 선생님도)


아침 기온이 3~4도일 정도로 이상 기온(저온)이다.


20230511_2.jpg 스페인 내륙운하

오늘은 스페인의 운하(canal)을 따라 걷는 코스가 포함됐다.


200여 년 전, 스페인 국왕이 국운을 걸고, 운하를 팠는데….. 아뿔싸 영국이 증기기관을 발명하고, 기관차를 만들어 철도를 놓네.


운하 계획은 철로를 까는 일에 밀려서 만들다 말았다. 그리고 스페인의 국운은 급격하게 기운다. 세계 패권을 영국에게 넘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스페인 내륙 운하는 유지되고 있다. 가끔 유람선이 지날 뿐.


운하를 따라가는 길이 3km 쯤 되려나….


작은아이가 아침부터 길바닥에 앉아 못가겠다고 운다.


괜히 트집 잡는 걸 알기에 화나는 대신 오기가 나서 내가 업고 가겠다고 했다.


“끝까지 업고 갈 수 없다면 업는다는 말 말아요”


“내가 끝까지 업고 갈게. 대신 배낭은 네가 매야 한다“


여자 선생님이 본다면 당장 말리겠지만, 여자 선생님은 저 멀리 앞서 걷기 때문에 상황을 모른다. 큰아이는 여자 선생님보다 훨씬 앞서 걷고 있고. 작은아이 몽니에 간극이 많이 벌어진 것.


이건 오기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업고 1km를 걸었다.


아이는 200미터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 힘들게 해서 미안하면 내리겠다고 해야지…)


결코 내리겠다는 말은 안 한다.


차라리 목마를 태울까 생각도 했다. 업는 게 힘들다.


그래도 5개월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아이의 몸이 많이 났다. 그새 큰 거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걸었다.


이제야 저제야 내리겠다고 할까 기다렸는데, 1km를 가니까 자기도 도저히 미안한지 내리겠단다.


반가운 마음이지만, ”더 가도 되는데…“하며 살짝 내려놓았다.


그후로 아이는 아무 불만 없이 잘 걸었다.


걸을 땐 몰랐는데, 1시간 후부터 뭔가 몸에서 신호가 온다.



18~19세기 서양의 과학자들이 대부분 자폐였다는 주장이 있다. 귀족이라 돈은 아쉽지 않고, 좋아하는 분야에 24시간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연구성과를 올렸다는 말이다. 일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에디슨이 만든 초창기 제네럴 일렉트릭 회사의 노동자가 에디슨의 못된 경영으로 죽음에 이르는 과잉 노동에 시달렸다는 건 사실이다. 에디슨은 1천 가지 발명특허를 가지고 있던 광인이었다.


20230511_3.jpg 칼 없이 상자를 찢어 트럭을 만든다

점심을 먹은 직후였다. 바르(bar; 스페인에서 마을의 작은 카페테리아를 흔히 bar라고 부른다) 주인에게 작은아이가 상자를 달라고 비언어적 표현을 했다. 주인은 라면 10개 정도 들어갈 크기의 빵상자를 줬다.


작은아이는 대충 눈대중으로 설계를 하더니 상자를 해체하고 손으로 찢었다. 가지고 있던 투명테이프를 꺼내 붙이고 덧대고 하더니…. 바퀴만 없는 트럭 한 대를 만든다.


적재함에 자기 애착인형 달팽이(터보)와 큰아이 애착인형 코알라(새턴)를 태우고 운동화끈(내가 제공)을 묶어서 끌고 간다.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하는 짓은 아기지만 솜씨와 구상은 결코 아이스럽지 않다.


그렇게 2km을 즐겁게 걷는다. 얇은 투명 테이프다보니 결국 바닥과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아이는 다시 울고 보채는 모드로 전환한다.



까리온은 버스터미널이 있을 정도로 큰 타운인데, 확인 가능한 숙소는 모두 매진이다. 그러고보니 내일은 다시 주말이다. 기대를 걸만한 수녀회 소속 알베르게가 있지만, 여자 선생님이 손사래를 친다. 서양코골이들, 너무 부실한 침대, 우리 아이들의 관리 문제 등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20230511_4.jpg

왜 슬픈 날인지는 여기에 쓰지 못한다.


그거 아시는가.


슬픈 날이 없다면 기쁜 날도 없다는 것을.


내일은 아이들이 힘들게 하지 않는 날이다. 패턴이 있으니 믿고 간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 감기 기운이 사리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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