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간이 우주를 만든다

2023.5.9(화)

by 박달나무

따르다호스에서 자고 일어나 숙소에 속한 카페테리아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8시 6분에 걷기 시작….


12km 떨어진 오르니요스(Hornillos)에 11시35분에 도착했다.


오르니요스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가려고(12시 오픈) 줄을 서서 1시간 가량 기다렸는데, 9자리를 남기고 내 앞에 6명이 대기 중이다. 딱 3개 침대만 남았기에 우리는 오르니요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몇 숙소는 모두 매진이다.


그래서 급하게 부킹닷컴으로 민박을 구해서 까스트로헤리스로 택시 이동했다.


2018/2019에 아이들과 순례길을 걸었는데, 한번도 숙소를 구하지 못한 날이 없었다. 언제나 사전 예약 없이 다녔다. 올해는 포스트 코로나로 순례꾼이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코로나 3년으로 폐업한 알베르게 및 민박이 많아서 숙소 구하기 힘들다.


대신 예기치 못한 숙소를 만나서 스페인 특유의 느낌을 만난다. 오늘은 시골 2층 독채에 묵으면서 아이들이 방 하나씩 따로 차지했다.


나는 코를 골고, 아이들은 특유의 소음을 내기 때문에, 알베르게는 이층침대가 매우 아슬아슬해서 늘 긴장하는데 오늘은 모든 긴장에서 해방됐다.



우리 아이들은 카미노에서 스타가 됐다. 수많은 한국인 순례꾼은 물론 외국인들도 다 알아본다. 셍장에서 만났다/OO에서 만났다 하며 반가워한다.


왠지 이제 한국인들은 우리 아이들을 피하는 느낌이다.



어른들이 1km를 12~13분에 걷는데, 우리는 30분 전후로 걷는다. 뒤로 가거나, 걷기를 거부하거나, 너무 빨리 앞으로 뛰어가거나, 힘들다고 쉬었다 가거나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 아저씨들은 다리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빨리 걷는다. 마치 빨리 걷기 대회에 참가한 사람 같다.


그런데,


빨리 걸으면 빠른 세계가, 느리게 걸으면 느린 세계가 열린다.


저 앞에 서둘러 걷는 아저씨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층위가 다르다.


삶의 속도가 다른 삶을 만든다.


우리가 꼭 미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기형적으로 정착된 성장 속도를 표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 태어나서 6년이 지나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만 12살이 지나면 중학생이 되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마치면 대학생이 되거나 취업자가 되는 프로그램은 단지 특정 문화를 반영한 제도일 뿐인데 말이다.


<세계 최고로 말 잘하는 2살> <세계에서 가장 아는 게 많은 5살>이 내가 두 아이에게 붙인 별명이다. 좀 천천히 걸어도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한다(이미 그렇게 두 번 걸었다)나이를 천천히 먹어도 성숙한 어른이 될 것이다.


다만 다른 속도이다보니 아이들이 경험하는 세계도 다르다. 단지 다른 차원을 관통하여 우리 아이들은 어른으로 자라고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적절하지 못한 카미노 통과 방법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거다. 그건 자전거 라이딩 자체의 의미만 있다. 굳이 카미노에서 타는 이유가 없다)


20230509_2.jpg 같은 장소, 다른 시간

아이들과 걷다보니 두 가지 일화가 떠오른다.


1) 이승만이 50년 대 말 종로통을 시찰나갔다가 종로소방서 첨탑 위에서 고생하는 대원을 위로했다. 대원은 “혼자서 외롭고, 화장실도 갈 수 없는 환경에서 장시간 근무하고 있다”며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했다가, 이승만의 시혜로 좋은 보직으로 옮기게 됐는데…. 해당 소방대원은 울면서 “그대로 근무할 수 있게 해달라” 애원했다.


그는 첨탑에서 관내를 살피면서 신고 없이 아궁이를 고치는 집을 점찍어 두었다가 퇴근 후에 찾아가 협박을 통해 뇌물을 받는 재미로 소방대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궁핍을 면할 수 없게 됐다.


2) 내가 국민학생일 때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김영삼의 신민당을 박정희가 돈을 대주며 잘 유지하게 도와준다는 거다. 야당이 있으니 국민들 보기에 툭탁거리는 맛도 있고, 야당이 선을 넘으면 잡아다가 정보부 지하에서 쪼인트를 까면서 협박하면 되니까 위험이 되지도 않고, 야당인 신민당이 박정희와 공화당의 영구집권을 위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언제나 역사는 반복되듯이 박정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권력은 두려운 후환을 잊을 정도로 짜릿하다)



내가 지난 30년 동안 바꾸지 않은 주장은, <아이들이 어떤 형태/형식의 언행을 보이든 모두 자기가 생존하기에 유리한 길이라고 믿는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말로 선생을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울부짖으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자기 생존에 유리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순례길을 걷는 두 아이가 계속 갈등 관계에 놓이는 것도, 지속적인 배타적 관계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계산한 것이다.


둘이 서로의 약점을 소재로 약을 올리며 갈등을 지속하는 건 자기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 믿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은 확신범이다.


그래서 설득이 불가능하다.


설득이 불가능한 사태는 나에겐 무척 당황스럽다. 교사 역할 평생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내가 괴로워할수록 의기양양해지는 시스템 속에 있다.


시스템을 바꾸고 싶었지만, 부수거나 내가 시스템을 떠나야만 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큰아이가 말한다.


“선생님이 왜 떠나요. 쟤만 내보내면 우린 행복하다구요”


작은아이가 대꾸한다.


“내 말이…. 반사!”


(내가 의역해서 편집한 대화. 진짜 말한 내용이 아님)



이게 제일 중요하다.


삶은 늘 그렇다. 어느 누구하나 어떤 시점에서든 평온한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그래도/어쨌든/반드시/무조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20230509_3.jpg 4년 전에는 깨끗했던 벽화가 세월의 흔적을 보인다

불과 4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인슈타인/간디/루터킹 목사 벽화가 많이 훼손됐더라. 2019년에는 벽화가 완성한 직후 나와 학생 둘이 지나갔었다.


셋 모두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인물이다.


언제나 세계는 열리기를 기대하며 모두의 앞에 서있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세계가 있다. 드물게 한 사람에게 두 세계가 동시에 열릴 수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럴 가능성이 있다. 두 세계를 막힘없이 뛰어다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keyword
이전 10화살짝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