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5.8(월)
지금은 30살이 넘은 제자로서 앱개발자로 귀한 몸이 된, 내가 학교 퇴직 후 처음으로 중고등 대안학교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지원한 학생이 성공회대 대안학교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경사가 있었다. 10월 말에 최종 합격발표가 났으니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됐다. 다른 동기들이나 후배들과 공부를 이어가는 것도 텐션이 떨어지고….
고민 끝에 대안학교 역사교사였다가 갭이어 시간을 보내는 30대 말 교사를 섭외해서 한 달 간 유럽투어를 시켰다.
여행을 마치고 둘이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 마중 나갔는데, 두 사람 사이 공기가 아주 냉랭하다. 특히 인솔한 선생은 학생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기고 횡하니 집으로 가버렸다.
장기여행에서 다투지 않는 커플이 없다.(남녀노소 불문)
만약에 말이다.
어떤 학생이 지각으로 수업 중인 교실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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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 (나무라는 말투로) 지금이 몇 시냐?
학생 : (시계를 보며) 9시 18분입니다.
선생 : (언성이 높아지며) 아니, 너 장난하냐?
학생 : 네? 몇 시냐고 물어보셔서 말씀 드린 것 뿐인데요….
선생 : 너 나랑 말장난하니?
학생 :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한 것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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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화가 오갔다면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
생장부터 걸어온 사람들 중 일부는 200km이상을 걸은 피곤이 누적돼서 부르고스에서 하루를 더 쉬다 걷기도 한다.
우리는 170km 정도 걸었다. 우리도 피곤이 누적됐다. 그래서 짐을 12km 떨어진 따르다호스 마을에 부치고, 부르고스 성당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구경했다.
13세기에 착공해서….16세기에 완공한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서…. 우리와 달리 석회암이 흔한 지역적 특성이 이런 대형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고, 로마제국의 힘과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며…..
알아듣든말든 기본 설명을 했고, 성당 이름과 왜 산타마리아를 붙였는지, 고딕양식이 무엇인지 기억하도록 말했다.
그러고도 부르고스 성당 광장에 있는 바르(bar)에서 2차 아침을 일부러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오늘은 큰아이가 토픽의 주인공이 됐다.
인간관계, 음식, 대화, 스킨십(손잡고 걷기 등)에서 독점을 하려는 큰아이의 일상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내가 큰아이를 나무라는 형식으로 말했다.
“더욱 관대, 즉 너그러워져야 하고, 너도 잘 알고 있는 <역지사지>처럼 상대방 입장에서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 그래야하죠?”
“왜 그래야하냐고 묻다니….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당연한 의무란다”
“그런 의무는 누가 짊어져주는 건가요. 저는 그런 의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데요”
“나는 너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만나는사람이 아니야. 니가 나를 선생으로서 생각한다면 나의 안내와 지시에 따라야한다”
“저는 제가 납득이 갈 때 선생님의 지시도 따르겠어요. 어이없는 지시는 따를 수 없어요”
”나는 꼭 필요한 경우에 필요한 지시를 한다. 잘 따르기 바라“
”필요한 지시인지는 제가 판단할게요”
어제 작은아이의 장남감 집착으로 머리에 쥐가 났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감정이 격앙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게 “워워”를 되뇌며 차분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차분’은 실패했다. 다행히 함께 있는 여자 선생님이 사태를 연착륙시켜줘서 사태가 재앙으로 번지지 않았다.
작은아이는 큰아이가 싫다고 거듭 말하는 특정 단어를 끊임없이 소리내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다툼을 한다.(내 입장에서는 큰아이가 말다툼을 하지 말고 ‘확실하게’ 작은아이를 제압했으면 좋겠는데, 큰아이 성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작은아이는 “내가 틱으로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이니 이해해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그 말은 큰아이를 더욱 짜증나게 한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탈 때부터 지금까지 둘 사이에 끊이지 않는 잡음이다.
서로 안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니, 인솔자 입장에서 참으로 곤란하고 스트레스 받는다.
(어른들과 떨어져 걸을 때, 둘만 있다면 가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있다)
감정이 격해지면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법이다. 그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 복기하면서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한다고 지적하니까,
“그건 선생님의 오해이고,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하려고 여행왔는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여행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큰아이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광장 맞은편 다른 식당의 야외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다.
2시쯤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보낸 수신처 숙소가 폐업 상태였다. 수소문하니 대각선 쪽 영업하는 숙소가 있고, 그곳에 우리 짐이 잘 와있다. 짐이 도착한 숙소에 침대를 얻었다.
대부분 부르고스에 머물기 때문에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지 않는다. 그래서 숙박업소에 자리가 널널하다.
늦은 점심을 먹는데, 큰아이가 조용히 묻는다.
“그럼 언제 한국행 비행기를 타나요?”
“응? 무슨 말이야?”
“아까 여행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셔서 묻는 거지요”
와…. 이제야 깨달음이 온다.
그런 거였구나.
너와 나는 다른 세계에서 핫라인을 통해 대화하고 있었구나. 서로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화법이 완전히 다르구나.
아주아주아주 친절하게 설명했다.
내가 말한 의도는 과장된 표현으로 네 태도를 바꾸려는 의도였지 진짜로 여행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라고. 흔히 사람들이 대화할 때 사용하는 과장 표현이라고. 나는 네가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내 실수가 있었다, 미안하고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사과한다….
큰아이는 안도의 표정으로 바뀌고 다시 예전의 어리광+귀요미+엉뚱함으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같이 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또 까먹고, 나야말로 내 입장에서만 상황을 설정하고, 이해하고, 반응하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