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분교의 유 기사
ⅲ. 시골 분교의 유 기사
목이 타고 오줌도 누어야 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기가 여전해서 지금 이 공간이 어디인지 잠시 가늠되지 않았다. 처음 방문한 유 기사의 집이고, 나에게 낯선 공간이라 긴장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더듬더듬 방문을 열었다. 구형 인켈 콘포넌트 오디오에서 목탁과 독경 소리가 나오고, 기계에 점점히 박힌 LED 불빛에 난닝구 차림의 사내가 머리를 숙이고 앉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내가 말했다.
“화장실 가시려구요. 제가 불을 켤게요.”
사내가 거실 조명을 켰고,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장실에 나와서 시계를 보고 5시를 알았다.
“유 기사님, 벌써 일어난 거예요. 지금 뭐 하세요.”
절에 가면 들을 수 있는 약간 높은 톤의 비구가 반야심경을 외는 소리가 오디오에서 계속 나왔다. 어제 춘천 시내에 나와 좀 넘치게 술을 마셔 20살 차이를 극복하고 가까워진 유 기사 옆에 나도 앉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고, 눈물이 방울방울 무릎에 떨어졌다.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무언가 있다. 분위기가 내 직감에 알려준다.
교대를 졸업한 해 10월에 서울 장위동에 있는 초등학교에 발령받았다. 갑자기 고향에 내려가 사표를 우편으로 보낸 2년 선배 교사가 맡은 6학년 2반 담임으로 들어갔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였다. 갓 발령받은 젊은 남자교사의 열정은 철철 넘쳤다. 하지만 <개구쟁이 나일등(최요한)> <2미터 선생님(오영민)> 등 80년 초반 베스트셀러 아동소설의 난장판 교실을 뛰어넘었다. 수많은 기쁨과 상처가 뒤엉켜 나는 강원도 전출을 신청하고 1994년 춘성군(현 춘천시) 사북면 오탄리 3학급 미니학교로 옮겼다. 춘천을 선택한 건 ‘내 엄마’와 관련 있다. 그 얘기는 다음 ⅳ편에 말할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남이섬 건너 마을 분교로 학교를 옮기고 유 기사를 만났다. 97년(또는 98년)이구나. 지금은 주무관이라고 부르는 기능직 학교방호원을 당시에는 ‘기사님’이라고 불렀다. 유 기사는 운동장 청소도 하고, 망가진 문짝도 손보고, 일주일에 두 번 교육청에 가서 공문 수령하고, 무엇보다 아침에 출근해서 전기밭솥에 밥을 지었다. 나와 유 기사가 점심에 겸상을 하고 매일 관사에서 밥을 먹었다. 그래도 20살 많은 삼촌뻘에 말수가 적었고 둘 다 관사 생활이 아닌 출퇴근을 해서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파병 다녀오고, 그 덕에 절둑절둑 걷게 된 사연은 알고 있었다.
“저는 매일 새벽에 눈을 떠요. 이렇게 독경 테이프를 틀고 빌고 또 빌지요.”
“누구에게 무얼 빌어요?”
“돈을 벌 수 있다고 해서 손을 들었어요. 월남에 가겠다고. 68년에 가서 수색대 전투원을 하다가 총상을 입고 6개월 입원했다가 제대하고 70년에 돌아왔어요. 덕분에 장사도 하고, 다 망했지만, 장가도 갈 수 있었지요.”
“고생이 많았겠군요.”
“첫 아이는 딸이었죠. 아이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아니 왜요?”
“제가 쏜 젖먹이 아기로 보였거든요. 딸이. 미치겠더라구요. 죽으려고 소양강둑에 두 번이나 갔어요. 약도 먹고 술도 많이 먹고…. 그렇게 정신을 놓고 살았어요. 마누라와 죽네 사네 싸우기만 하고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죠. 그러다가 다 털어먹고 상이군인을 학교 아저씨로 써준다고 해서 인제 산골짜기 분교에서 학교 기사로 일하게 됐어요.”
유 기사는 월남전에 말단 분대원으로 참가했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를 가만 놔두지 않는 사연은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엄마와 아기를 총으로 쏜 일이다. 수색대는 이미 소개된 어느 마을을 정찰했고, 텅 빈 마을이지만 유일하게 젖먹이 아기와 엄마를 발견했다. 집 밖으로 나오라고 하고 샅샅이 집 수색을 한 다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문밖에 아기를 안고 마당에 털썩 앉은 엄마를 죽이라고 분대장이 유 상병에게 명령했다. 유 상병은 주저했고 몸을 돌려 명령을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다. 분대장은 권총을 뽑아 유 상병 관자놀이에 댔다. 총을 쏘지 않으면 니가 내 손에 죽는다 하더니 분대장은 아기 엄마를 쐈다.옆으로 꼬꾸라진 엄마 품에서 떨어진 아기가 울기 시작했다.
애는 니가 쏴 죽여라.
분대장이 유 상병에게 명령했다. 동시에 관자놀이에 댄 권총 방아쇠를 절반 잡아당긴다.
여기서 니가 죽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어. 내가 한둘을 죽였나. 오늘 니가 죽을 뿐이야.
유 상병은 얼굴을 돌리고 소총으로 아기를 쐈다. 보지 않고 쏘는 바람에 아기가 죽지 않았다.
다시 쏴. 똑바로 보고 쏴 죽여.
유 기사는 죽은 아기와 아기 엄마를 위해 매일 새벽에 독경 소리를 듣으며 참회의 기도를 올려야 일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날은 특별히 당시 생각이 생생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30년 동안 고통의 시간을 산 유 기사는 20년 더 고통 속에 살다가 세상을 등졌다.
내가 유 기사의 끔찍한 아픔을 듣고 2년 후에 본교 교장의 베트남 증언을 들었다. 당시 나는 본교에 가서 테니스를 자주 쳤다. 테니스를 치고 뒤풀이로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나 때는 말이야’ 분위기로 대화를 했다. 최 교장도 비슷한 시기에 베트남 참전했다고 했다. 자신은 행정병이라서 직접 전투한 적이 없으며 아군이든 적군이든 시신을 목격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어느 날 베트남 아줌마가 우리 부대를 방문했어. 자기 딸을 강간한 병사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했지. 엄청 흥분했고, 무서운 게 없다는 표정이었어. 중대장이 머리 숙여 사과하고 흥분한 아줌마를 달래서 돌려보냈어. 강간 병사는 벌을 주고 당신 딸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겠다고 한 거야. 아줌마가 돌아가고 중대장은 강간 병사를 찾아서 데려오라고 했어. 베트남 여인에 대한 강간은 흔한 일이었지. 물론 난 그런 일이 전혀 없었고. 강간 병사가 중대장에게 불려왔어.”
중대장은 호출된 병사의 귀싸대기를 힘껏 갈겼다. 야 이 새끼야. 강간을 했으면 직후에 쏴 죽이라고 몇 번을 말해. 왜 이런 일을 만드냐 말이야. 빨리 가서 둘 다 죽여버려. 바보 새끼야.
“그 병사가 막사를 나가서 어찌 처리했는지 나는 몰라.”
최 교장의 말을 들은 우리 일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굳이 묻고 싶지 않았다. 바보 소리를 듣고 처리하러 나간 병사의 결과를 듣고 싶지 않았다. 최 교장이 모른다고 했으니 우리도 모르는 거다.
<너 죽고 싶어!> 어릴 때부터 들었고, 내가 교사가 되고 나서도 아이를 을러대며 하기도 한 말이다. 죽고 싶어, 죽여버릴 거야. 생각하면 얼마나 극단적인 말인지 안다. 지난 100년 동안, 동학농민전쟁 때 일본군에게 3만 명이 떼죽음을 당한 이래 식민지, 해방 정국, 6.25, 4.19, 베트남, 유신정치, 5.18광주, 남산과 남영동, 세월호로 이어지는 극단의 정서를 극단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내가 강원도 분교 근무 이후 <너 죽고 싶어!>를 입에 담지 않지만 영화 드라마는 여전하다. 우리가 얼마나 극단적이고 끔찍한 정서에 휩싸여 있는지 모르고 산다. 지금 10대 아이들을 보면 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