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염이 지속된 한주, 누군가 사무실 창문을 열어두는 바람에 그만 더위를 먹어버렸다. 다음날 아침, 속이 울렁거리고 토하고 싶은데 머리까지 아프고 식은땀이 나 하루 병가를 낼 수 밖에 없었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기 위해 암막커튼을 쳐둔채, 작은 오피스텔 안에서 혼자 하루를 보냈다. 뭘 먹어도, 먹지 않아도 괴로운, 가만히 앉아 생각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긴시간동안, 나는 조용히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게걸스러운 욕심들을 끊어내자. 나의 한계를 직시하자. 애초에 몸이 튼튼한 사람이 아닌데 뭘 그렇게 해보겠다고 애썼던 걸까? 살아오는 내내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마흔을 앞둔 최근에서야 이것들을 보내주기로 마음 먹었는데, 더위로 몸이 아프니 그 결심이 더 절실해진 거다.
희망을 갖는건 좋은데, 자기 현실을 보란 말이야.
자기는 희망이 있어. 그런데 자기 현실을 보니까 담배도 못 끊고, 일찍 일어나는 것도 안되고 이런게 자기 현실이란 말이야. 그러면 늘 이렇게 이 자기의 이상을 너무 높여놓고 자기 현실을 볼 때는 자기가 불만이야. 불만이면 자학이 생기는거야. 나를 내가 미워해. 나에 대해서 실망하고. 이때 이 현실을 이상에 맞게 끌어올려야 하느냐 그게 아니야. 이 이상을 버려야해. 그러면 자기를 자기가 미워할 이유가 없잖아.
자기를 이상에 맞게 끌어올리려면 엄청나게 힘이 들고, 자기가 여러 번 경험했지만 자기 그렇게 못하잖아. 자학을 하게 돼. 그럼 자기가 초라해져. 그럼 이 생각을 버려버리면 어떠니. 자기 그래도 괜찮잖아? 키도 그만하면 됐고, 인물도 그만하면 됐고. 괜찮은 남자야. 음악도 좋아하고. 그러니까 지금 있는 자기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해. 자기는 늘 생각을 높여놓고, 그걸 자꾸 억지로 자기를 끌고 가려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지쳐 있다는 거야.
나는 이 동영상을 10년전부터 꾸준히 봐왔다. 욕심으로 괴로울때마다 조용히 이 영상을 반복 재생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현실에서는 도저히 놓아지지 않더라. 욕심을 놓으면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욕심에 짓눌려 막상하는건 별로 없었고, 계획하고 자책하고 질투하는 일만 많아졌다. 무언가를 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나 자신을 갉아먹기도 했다.
다행히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뤘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때가 됐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내려놓자는 생각을 한다. 스님 말대로 나는 늘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않고, 그리고 계획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나를 미워해 왔었다. 나는 늘 초라했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많이 지쳤던것 같다.
좋은 말, 인생에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글들은 이미 어릴때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식을 얻기는 쉽지만 지혜를 얻는건 훨씬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경험이라던가, 시간이라던가, 상처라던가 하는.
2.
8월의 첫 주말, 가족들과 안동 월영교에 헛제삿밥을 먹으러 갔다. 가장 유명하다는 집에 갔는데 외국인 종업원들만 있고 제대로 응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디 앉아야하냐 물어봤지만 외국인 종업원들과는 소통이 힘들었다. 몇년 전에 왔을때 좋은 기억으로 남아 다시 온 것이었는데,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며 불만이 쏟아졌고,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앉아 있자니 이건 좀 아닌것 같아 덜 유명한 옆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언니가 먼저 탐사를 가본 후 전화로 건너오라고 했고, 우리는 우르르 가게를 나서 옆 집으로 갔다. 이 집은 이미 우리가 온 것도, 주문하려던 것도, 그리고 가는것도 모르는 듯 했다.
다행히 옆집은 빠른 응대가 가능한 곳이어서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금세 음식이 나왔고 음식도 유명한 집보다 괜찮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하마터면 소중한 가족행사를 망칠 뻔했는데 빠른 판단으로 모두가 흡족해하는 여행이 될 수 있었다. 헛제삿밥을 드셔본 엄마가 자신도 집에서 이렇게 해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하니, 이번 여행은 꽤 만족스러우셨던것 같다. 엄마가 좋았으면 다 좋았던 거다.
3.
오랜만에 만난 어르신 두분과 몇몇 또래가 함께한 점심자리가 있었다. 처음보는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얼굴이 익은 분들이었다. 어색할 수 있는 자리였지만 맛있는 소불고기도 먹고 이런저런 정보도 듣는 꽤나 재밌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나는 나이와 관계없이 나와 관심사가 맞는 사람들을 좋아하는데, 이번 모임에 오신 어르신 중에 한분이 그런 분이었다. 나중에 퇴직하시고 뭘 심을 건지, 뭘 수집할 건지 계획을 알려주시는데 참으로 흥미가 갔다. 내가 모르는 다양한 종자와 품종을 알고 계시는것도 좋았다. 이 분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게 아쉽다. 스무살씩 차이나도 잘 친해지는 성격이지만, 이 분은 나와 같이 근무 한다던가 하는 접점이 없어 더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나중에 글을 쓰든 농장을 만들든 뭐라도 해주시면 좋겠다. 역시, 어느 분야든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분야가 내가 좋아하는 쪽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