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부재

빈자리를 채운 따뜻한 밥상 하나

by 신지훈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엄마가 갑작스레 병을 얻으셨다. 정확히 어떤 병이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 돌아보면 뇌와 관련된 병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당시 나는 어려서 병명을 궁금해하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저 엄마가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오래 계셔야 한다는 사실만 알았다.


엄마의 부재는 집안의 공기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방과 후 집에 들어서도 “왔니?” 하고 반겨주는 목소리가 없었다. 엄마가 해 주시는 밥 냄새, 생선 굽는 냄새 대신 어딘가 싸늘한 공기가 나를 맞이했다. 저녁이면 불 꺼진 안방에서 텔레비전 불빛만 깜박이고 있었다. 냉장고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문만 열었다 닫곤 했다. 무언가 먹을 게 있길 바라면서도, 정작 꺼내 입에 넣지는 못했다. 그때의 공허함은 단순히 배고픔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춘기 초입이던 나는 이미 무기력했다. (원래도 안 했지만)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날이 반복되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늘 잘한다는 말을 들었는데(a.k.a. 산수경시반 출신), 중학교에 들어오자 모든 게 무너졌다. 성적표를 받아 들고 받은 충격은 컸지만, 그렇다고 공부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늉만 했을 뿐,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그러던 와중에 엄마마저 곁에 없으니, 그걸 핑계 삼아 공부와 일상에 모두 무성의했다.


엄마의 공백을 메운 사람은 ‘이모’이다. 지금으로 치면 그냥 같은 동네 동생일 뿐인데, 나에겐 진짜 이모보다 더 이모 같았던 분이다. 이모는 그 시절 내겐 누구보다 따뜻한 울타리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 옆에 사시던 이모 댁으로 향했다. 문을 열면 풍기는 된장국과 계란말이의 냄새, 가끔은 고등어 굽는 냄새. 그 냄새들이 나를 살게 했다. 이모는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채 밥상을 차려 주셨다. 아이가 칭얼대면 젓가락을 잠시 내려두고 등을 토닥이며, 다시 내 밥그릇에 반찬을 올려주셨다. 나는 말없이 밥을 먹었고, 이모는 늘 “좀 더 먹어라” 하고 웃었다. 그 짧은 대화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든든하게 했다.


당시엔 학교 급식이 없었고, 도시락을 싸 오지 않으면 매점에서 라면이나 과자를 사 먹어야 했다. 하지만 집안 사정상 용돈은 늘 빠듯했다. 주머니엔 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따뜻한 밥을 차려준 이모의 마음은, 지금 돌이켜보면 그 어떤 호사보다 값졌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이었고, 가장 큰 위로였다. 내 허기와 공허함을 모두 채워주는 소중하고 귀한 밥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에게 말도 없이 수학여행을 갔던 일이 있었다. 이모는 평소와 같이 점심을 차려두고 나를 기다렸지만 내가 오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가 누나로부터 내가 수학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아시게 되었다. 당시 나는 혹시 수학여행 간다면 용돈이나 먹을 것을 싸주실까 봐, 이모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던 심정에서 말없이 수학여행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모는 아주 훗날 그때 내 수학여행을 챙겨주지 못했다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셨다. 나는 잊고 지나간 일이었는데, 이모는 평생 마음의 빚처럼 품고 계셨다. 십 대의 어설픈 배려가 누군가의 오랜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서른 즈음이던 이모보다 이제는 내가 더 훨씬 나이 들었고, 나는 그때의 빚을 아직도 갚지 못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밥상 위 김이 피어오르는 장면이 눈가에 아른거린다. 이모의 돌봄이 엄마의 부재를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더는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준 힘이었다.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죄송하고, 여전히 감사하다.


그 시절이 지나고 엄마는 다행히 회복되셨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내 안에 깊이 남아, 지금도 가족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연약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부재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가끔 아내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내가 먼저 가면…”
“혹시 내가 쓰러지면…”


어쩌다 그런 말을 꺼냈다가 2절까지 가면, 나는 괜히 짜증부터 낸다. 왜 자꾸 끔찍한 소리를 하냐고. 하지만 곧 깨닫는다. 농담처럼 건네는 말 뒤에, 서로의 부재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지는 지금, 나 자신의 영원한 부재인 죽음에 대한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그림자다.


뉴스에서 젊은 부모가 아이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나는 끝까지 읽지 못한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창을 닫아버린다. 남겨진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그들이 견뎌야 할 긴 시간의 상처가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제이의 얼굴과 겹쳐지는 순간, 글자를 따라가는 눈길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종종 생각한다.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우리가 언젠가 떠날 그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남기지 말아야 할지. 재산이나 물질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가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될 어떤 마음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에게 남기고 싶은 건 화려한 유산이 아니라(가진 것도 없거니와), 따뜻한 밥 한 끼 같은 기억이다. 제이가 나이 들어 힘들 때마다 떠올리면 다시 살아갈 힘이 되는 그런 기억 말이다.


가끔 예상 밖 시간에 전화가 울리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있다. 아무 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혹시 무슨 안 좋은 소식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가슴을 스친다. 예전에는 몰랐다. 전화가 단순한 소식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통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다행히 이번에도 별일 없는 안부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안다. 언젠가 그 전화는 정말 상실을 통보할 것이다. 부모님이든, 친구든, 혹은 나 자신이든. 부재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떠난다. 다만 나는 바란다. 제이가 언젠가 힘든 순간을 맞이했을 때, 내가 해준 어떤 따뜻한 기억 하나가 그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기를. 이모의 된장국과 계란말이가 그 시절의 나를 버텨내게 해 준 것처럼 말이다.


그때 제이는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오히려 마음속 가장 따뜻한 자리에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나의 부재도, 그리 두렵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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