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 기억 저편에
이른 아침, 회사 구내식당 입구에서 신입사원 시절 같은 본부에서 일했던 성품 좋은 선배님과 아주 오랜만에 마주쳤다.
"어, 안 그래도 요즘 어떻게 지내나 했는데!"
선배님은 여전히 그때 그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셨다. 우린 반가워하면서 서로의 근황을 잠시 나누고 헤어졌다. 신입사원 시절, 늘 웃는 얼굴로 대해주셨던 그분은 여전히 같은 등급의 미소를 유지하고 계셨다. 여전하셨다. 오전 8시가 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웃는 얼굴을 세팅하고 계시다니. (내게 미소는 주로 오전 10시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얼굴 사이즈는 두 배, 눈가에는 겹주름이 잡힌 말 그대로 아재가 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나가시는 선배님과의 짧은 해후를 뒤로하고, '여전하시네' 생각하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식판을 들었다. 그런데 미역국을 한 국자 뜨는 순간, 갑자기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가만… 근데 저 선배님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밥을 먹는 내내 떠올리려고 애를 써봤지만 실패였다. 처음에는 '아침잠도 덜 깨고, 오랜만에 봤으니 잠시 안 떠오르는 거지' 싶었다. 뭐,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제목이, 또는 가수 이름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도로 들어가 버리는 때처럼. 하지만 사무실에 올라와 업무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이름의 초성조차 기억해 내지 못했다.
'테스트를 해 볼까?'
현재 근무하고 계신 부서를 말씀하셨으니 사내 114를 뒤져보면 금방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기가 났다. 이렇게 된 거 언제까지 생각이 안 나는지 두고보자 싶었다. 내가 그 선배님의 이름을 완전히 잊은 건지, 단순히 일시적 건망증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후자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와는 달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내 머릿속에 선배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기억이 되돌아올 때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그 선배님만을 붙들 수는 없으니, 구내식당에 갈 때마다 '오늘은 떠오르려나'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정답은 늘 '내일 다시'로 미뤄졌다. 지금은 이렇게 차분하게 당시를 회상하고 있지만, 답답해서 미쳐버리는 것 같았다.
나이 들수록 이름을 더 잘 까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과학자들 말로는 ‘고유명사 기억’이 뇌에서 제일 빨리 탈락하는 부분이라나. 이름은 다른 단어랑 연결 고리가 약해서, 뇌 입장에선 ‘갈고리 없는 옷걸이’ 같은 거라고 한다. 걸어둘 데가 없으니 툭 치면 그냥 바닥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나이 들면 ‘뜻에서 소리로 가는 통로’가 막히기 시작한다는데, 그래서 얼굴이랑 말투는 환히 떠올라도 정작 이름에선 <404 Not Found>가 뜬다. 마치 컴퓨터가 용량 부족할 때 쓸데없어 보이는 파일부터 지워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그게 바로 이름이라는 거다.
시간은 흘러 한 주가 훌쩍 지나 오늘이 되었다. 그리고 참회와 자책의 심정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까지도 선배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더 무거운 생각이 스쳤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이렇게 잊어버리는 것처럼, 누군가도 나를 자연스럽게 잊겠지.'
대학 시절 함께 밤새 술 마시던 친구들 얼굴은 떠오르지만 이름은 희미하다. 자주 연락하던 예전 동료들도 차츰 멀어져 이름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수많은 인연들 가운데 어떤 이름은 오래 기억되지만, 어떤 이름은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선배님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내 몹쓸 기억력을 한탄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글을 절반 정도 쓰던 시점에) 기적처럼 선배님의 이름이 떠올랐다. 먼바다에서 해가 떠오르듯 내 뒤통수에서 정수리로 찬란하게 쑤-욱 솟아올랐다. 정말 기적적으로. 너무 반가워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이름이 이렇게 귀한 것이었나.
언젠가는 나 역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이름은 모르겠는데 사람 좋다가도 가끔은 너무 까칠한 아저씨” 정도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날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은 무모한 희망이라는 것을 이제는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되었다.
잊혀졌던 이름 하나를 되찾았으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묘한 허전함이 남았다. 누군가를 잊는 건 단순한 망각이 아니라, 관계의 퇴색이기도 하니까.
언젠가 나도, 이름 대신 흐릿한 인상으로만 남게 되겠지.
P.S. 근데, 선배님, 제 이름 기억하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