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에는 또 뭐 쓰지?
이병헌 감독의 자전적(?)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는 진지하게 애정하는 B급 코미디 영화이다. 스토리는 감독 지망생 병헌씨가 주인공인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가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영화 제작을 성사시켜 나가는 과정을 담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목표다. (현실 이병헌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고, 이 영화 개봉 6년 뒤에 <극한직업>으로 천만 영화감독이 되었으니 그의 필모에서 꽤 상징적인 영화. <족구왕> st. 영화 좋아한다면 무조건 보시길 권함.)
문제는 병헌씨가 도무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작업은 하지 않고 빈둥거리다가 나가서 친구들과 술 먹고 다음 날 숙취에 시달려 느지막이 깨서는 거하게 밥을 차려 먹는다. 한참 청소를 하고는 누워서 천장 보다가 영화 몇 편 보고, 해가 지면 또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신다. 물론 컴퓨터 앞에서 잠시 작업을 하기도 한다. 시나리오 제목을 적고는 마음에 드는 서체를 고르는 데 한 시간 넘게 할애한다. 그러다 갑자기 산책한다고 나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고 꽐라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까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술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일상인데, 거기서 한 편의 멋진 영화감독의 데뷔 스토리를 뽑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좋게 봐줘도 하루에 한 시간 일하는 게 고작인 병헌씨를 며칠 따라다니던 방송국 관계자들은 이 다큐멘터리는 글렀다는 결론을 낸다. 그런데 갑자기 이병헌 감독에게 메일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완성된 시나리오와 함께…. 그리고 여기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가 나온다.
(방송국 PD)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일하시던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완성하셨어요?”
(병헌씨) “나 24시간 일하는데? 스물세 시간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정리한 걸 한 시간 동안 쓰는 거죠. 이 시나리오라는 게 타이핑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속기사도 아니고.”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나는 크게 환호했다.
‘아니, 이거 나잖아.’
회사에서 가끔 그런 말을 듣는다.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데, 결과가 뚝딱하고 나오네?” 알고 있다. 그 말에는 칭찬과 약간의 의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티’를 내기 위해 목소리를 키우거나, 키보드를 요란하게 치거나,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다. 급한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면 오히려 뒷짐 지고 사무실을 산책하거나, 팔짱을 끼고 명상(자는 것 아님)을 하기도 한다. 그 과정 없이 서두르면 오히려 스텝이 꼬인다.
나만의 루틴을 진행하다 보면 ‘멍한 상태’를 뚫고 머릿속에서 쓸 만한 아이디어가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산만하게 보이는 노트에 키워드를 적고, 이슈 사항과 디테일을 옮긴다. 그리고 동료들과 공유하고 일을 진행시킨다. 결과물은 단숨에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단숨을 위해 일주일 내도록 숨을 고르며 머릿속에서 나 홀로 브레인스토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브런치 연재도 마찬가지다. 월요일부터 이미 새로운 글감이 머릿속에 걸린다. 아직 한 글자도 쓰지 않았지만, 틈틈이 문장들을 떠올려 본다. 출근길 운전대를 잡고 첫 문장을 중얼거리고, 퇴근 후 자려고 누워 유튜브를 보며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오늘 저녁 제이가 한 말이 후반부 반전으로 어울릴 것 같아 마음속에 저장해 둔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도 역시 손보다 머리가 분주하다. 글감에 맞는 기억을 꺼내고, 필요한 장면을 재구성한다. 매주 연재 에세이를 쓰겠다고 해놓고 겉으로 보면 나도 병헌씨처럼 빈둥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시간이야말로 내겐 가장 치열한 ‘작업 시간’이다.
토요일쯤 되면 대충 얼개가 갖춰져 간다. 하지만 그 ‘거의 완성’은 믿을 게 못 된다. 나조차도 읽을 만한 글이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물 1리터에 진라면 순한맛 한 봉지를 넣고, 라면 수프는 절반만 넣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일부러 빨래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한다. 손을 움직이며 머릿속을 비우면, 흩어진 조각들이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 순간 ‘오늘 다 쓸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토요일 밤을 넘기고 일요일 새벽, 집중의 순간이 열린다. 일주일 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던 문장들이 한꺼번에 줄지어 나온다. 미리 숙성된 생각들이 키보드를 타고 흘러나올 때, 나는 잠시 병헌씨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누가 찾는 것도 아닌데 단지 무뎌진 글쓰기 루틴을 다잡기 위해 시작한 주 1회 연재가 벌써 열세 번째다. 나는 또 다음 일요일을 향해 글감을 품을 것이다. 그런 내게 건네고 싶은 말은 바로 이거다.
<추신>
마감 직전에 쓰는 루틴을 변명하기 위한 글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