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많은 아저씨

대학원 입학 수난기록 — 새벽에 남긴 메모

by 신지훈

믿기 어렵겠지만 그날은 대학원 두 곳에 동시에 입학한 날이었다. 하나는 경영대학원이었고, 하나는 공대대학원이었다. "너는 문과도 이과도 다 해낼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첫 수업에는 일단 들어가야 했다. 경영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바삐 공대 수업으로 이동하려는데, 문제는 공과대학 건물을 찾는 일이었다.


캠퍼스 지도를 발견하고는 지도를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안경을 살짝 벗어 눈에 힘을 주니 그제야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도에는 건물들이 12번, 37번, 53번 이런 식으로 산재해 있었는데, 유독 81번만 보이지 않았다. 그냥 뛰는 수밖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다 보니, 뜬금없이 졸업앨범 판매 부스 앞에 서 있기도 하고, 학생회관 지하 매점에서 핫바를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조바심이 밀려왔다. 자꾸만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을 하고 있었다. 첫 수업 지각하면 바로 F라는 소문을 들은 바 있어서 더욱 초조했다.


그때 나와 똑같이 2개 대학원에 동시 입학한 동기가 슬그머니 나타나 81번 건물이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그 옆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너 왜 이렇게 허둥대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강의실 문을 열었지만, 교수님 강의 내용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칠판에 쓴 공식들은 고대국가의 상형문자처럼 느껴졌다.


‘아, 이게 아닌데.'


첫 시간 만에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미 지각도 했겠다, '공대 대학원은 나와 인연이 아니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기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빛만 주고받았는데도 서로의 마음이 읽혔다.


"그만… 둘까?”


그런데 강의실을 나가려니 또 일이 꼬였다. 들어올 땐 내 맘대로였지만, 나가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출구를 아무리 찾아도 길이 막혀 있었고,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순간 동기가 "따라와" 하며 손짓했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주차요금 정산기 옆에 은행 ATM처럼 생긴 키오스크가 있었다. 거기에 동기가 학번을 입력하니 화면에 ‘입학취소’ 메뉴가 떴다. 화면 하단엔 <당일 취소 시, 위약금 0원>이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있었다. 동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버튼을 눌렀다. 나 역시 수강 취소를 완료하고,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공대대학원을 탈출(?)했다.


“난 문창과에 가야겠어.”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돌연 선언했다. 동기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너 댓글밖에 써 본 적 없잖아!"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단단히 미쳤구만"이라고 한마디 던지고 그 벌건 얼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화낼 일인가 싶어 당황해하고 있는데 순간 아버지에게서 톡이 왔다.


"영화 티켓 좀 예매해 주라. <서울의 밤>인지 <봄>인지, 그거.”


나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멍해졌다. 81번 공과대학 건물에서 학번을 한 번 입력하자마자 대학원 입학이 취소되고, 돌연 문창과에 가겠다고 결심한 내 앞에 뜬 <서울의 밤인지 봄인지>로 인해 이질감이 확 밀려왔다. 순간 깨달았다.


‘아, 이게 다 꿈이구나.’


나는 이미 눈을 뜬 상태였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막 현실로 한 발 내딛는 중이었다. 순간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다. 우선 아버지 영화표 예매부터 해드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 잠은 멀리 달아나 있었다. 대신 노트북을 꺼내 방금 꾼 꿈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대체 왜 이런 꿈을 꾼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날, 조카와 대학입시에 관해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기억이 그대로 변주되어 꿈으로 나온 게다.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중학생이야?”며 비웃더니만, 이내 “기왕 이렇게 된 거, 진짜 한번 가봐”라며 덧붙였다. 그저 웃자고 한 이야기에 괜히 진지해져서 잠시 문창과에 입학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비록 꿈에서는 댓글밖에 써 본 적 없다고 타박받았지만, 현실의 나는 적어도 틈틈이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지 않은가. 아내 말대로 정말 문창과를 알아볼까 싶어 그새 입학 전형을 찾아보고 있었다. 1절만 하면 되는데….


꿈이라는 게 참 묘하다. 평소 깊이 숨겨둔 욕망을 아주 직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꿈이 현실보다 더 솔직할 때가 많다. 이번 꿈속에서도 나는 망설임 없이 "문창과에 가야겠어"라고 선언했으니까. 현실에서의 나라면 백 번쯤 고민하고도 불가능한 이유만 늘어놓았을 텐데 말이다. 꿈속의 나는 진짜 내 욕망에 더 가깝게 다가가 있다. 꿈속의 친구는 결국 현실의 나일 테고.




그래서 내 선택은 뭐냐고? 문창과는 무슨. 글을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된다. 그건 꿈이 아니고, 내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 게다가,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꿈을 이뤄내고 있지 않은가. 이미 이렇게 일요일 새벽부터 글을 쓰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극장을 다녀오신 뒤 "다 아는 스토리라 재미는 별로 없더라"면서도, "그래도 박진감은 있었다"라는 짧은 후기를 보내주셨다. 왠지 내 꿈을 두고 하는 말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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