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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Aug 30. 2020

삶의 숨겨진 목록

이번생 영어는 망했어

왜 영어를 잘하고 싶으세요?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해 찾아간 학원에서 외국인 강사가 한 질문이다. 그러게, 나는 왜 영어로 잘 말하고 싶을까?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만 생각했지, 내가 왜 영어를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나에게 물은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디자이너로서, 캘리그라피 작가로서, 글 쓰는 작가로서도 이런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막연히 디자인을 잘하고 싶다거나 글씨를 잘 쓰고 싶다, 혹은 글은 어떻게 쓰는 거냐 라는 큰 덩어리의 추상적인 질문을 들으면 일단 질문을 쪼갠다.

“구체적으로 어떤 디자인을 어떻게 잘하고 싶어? 예를 들면 아기 앨범을 잘 꾸며주고 싶어? 아니면 사진 보정을 위한 포토샵을 잘하고 싶은 거야?”
“캘리그라피는 부업으로 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글씨를 교정하고 싶으세요?”
“글이 왜 쓰고 싶으세요? 작가가 꿈이세요? 혹시 독립출판에 관심이 있으세요? 영감을 받은 책이나 글이 있나요?”

족집게 과외처럼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일단 질문이 정확해야 한다. 만약 질문을 이렇게 했다면 나는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요즘 상품 만드는 일이 취민데 사람들이 예쁘다고 해서 한번 팔아보고 싶어. 그래서 사진을 찍어봤는데 제품이 돋보이지가 않았어. 상품이 돋보이게 찍을 수 있는 팁이 없을까?”

아직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은 막연하다. 하고는 싶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묻는다는 게 “디자인적 감각은 타고나야 하지? 나도 디자인 잘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이다. 이럴 때 나는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했을 때 ‘그냥 좋아서’라는 대답도 많이 듣는다. 나도 그냥 영어를 잘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짜 어떤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배우러 가기 전에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으면 일단 자전거를 사는 것처럼,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으면 눈앞에 있는 볼펜으로 포스트잇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물론 각자 다른 환경과 상황이 있다. 너무 좋아해서 당장 하고 싶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티브이에서나 책 속에서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글을 쓰는 게 좋아서 요즘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어. 글을 써보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순서로 글을 쓰는지가 궁금해지더라. 너는 제목을 어떻게 정해?”

나는 아마도 영어를 못하는 이유로 “아직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라는 핑계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살만 빼면 엄청 예뻐질 것 같다는 종류의 ‘아직 하지 않은 자’의 흔한 착각이다. 아직도 엄마들의 단골 멘트라는 “우리 애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해요”도 같은 종류의 착각이 아닐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이미 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를 항상 “해야 하는데”의 카테고리로 넣어두고 살아온 세월만 20년 남짓이다. 몇 년 전 그 외국인 강사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도 나는 일 년에 몇 번씩 영어학원을 등록했을지 모른다. 그 일을 계기로 왜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해야 한다는 카테고리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본 적이 있다. 영어, 디자인, 캘리그라피, 다이어트, 피부관리, 운전, 결혼, 좋은 사람, 잘난 딸 등등. 이 것들 중에 그나마 내가 잘하게 된 건 해야 해서 오랫동안 해왔던 ‘디자인’밖에 없었다. 영어, 캘리그라피, 다이어트도 좋은 사람도 해야 한다는 생각뿐 실천하지 못한 것들이다. 생각해봤다. 나에게 정말 영어를 잘하는 게 필요한지, 지금 당장 누가 뭐래도 시작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일인지. 아주 오랫동안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를 괴롭혀왔던 영어를 그때 포기했다. “나의 이번 생 영어는 망했다” 그렇게 하나의 숙제가 빠지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이렇게 쉽게 가벼워질 일을 왜 그토록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던 건지. 피부관리도 목록에서 지웠다. 거기에 많은 돈을 투자할 만큼 지금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투자할 노력도 사실은 자신이 없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잘난 딸이 되는 것도 목록에서 지웠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되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지면 된다는 걸 알았고, 훌륭한 딸이 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망한 일.

그렇게 목록을 정리하다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오히려 나에게 행운과 행복을 가져다준 것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해왔던 사소한 일’이었다는 것.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내가 못하고 부족한 것들만 잘하려고 생각하느라 이미 해오던 것들의 대단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글쓰기, 좋은 책 고르기, 익숙한 것 낯설게 보기, 사소한 것 자세히 보기, 해야 할 감사를 미루지 않기, 필요 없는 것 사지 않기.

나에게 기쁨과 작은 성공의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것은 내가 이미 하고 있던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다시 겪지 못할 즐거운 경험들을 하게 됐고, 좋은 책을 골라 정독한 덕분에 친구들에게 좋은 말을 적절할 때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됐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며 조금 느리게 살아온 덕분에 일상 속에서 사소한 것들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고 사소한 것을 자세히 본 덕분에 사소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은 ‘해야 할 것’의 목록에 포함될 수 없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무조건’이나 ‘무식하게’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 목록은 숨겨져 있어 “숨겨진 목록 보기”를 하지 않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잘하게 되는 것은 이 숨겨진 목록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숨겨진 목록에 있는 것들을 하루빨리 알아차리고 꺼내보길 바란다. 때로는 숨겨진 그 목록 속에 엄청난 나의 다음 인생이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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