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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도르 Jan 23. 2021

말하려다 삼키는 마음

따뜻한 걸 마음에 품는 사람들


'전송'버튼을 누르려다 머뭇거린다. '내가 이 말을 해도 될까?' 하는 생각에 결국 채워진 글자들을 지우고 만다. 말 한마디를 앞에 두고 수십 가지의 생각을 덧붙인다. 오늘도 나는 말을 하려다 삼키고, 글을 썼다가 지운다. 삶의 경험이 쌓일수록 말 한마디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을 목격한 횟수도 쌓여갔다. 내가 한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었겠구나 하고 생각한 건 내가 그 말들에 상처를 받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내가 아무리 완벽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해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나도 누군가에겐 개새끼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말이라는게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아서 미래에 생길 상처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말을 삼키는 게 낫다는 사실을 나이를 먹을수록 뼈저리게 통감했다. 상처를 받기 싫은 만큼 상처를 주는 것도 싫어진 것.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를 무척 좋아한다. 해가 저물 무렵 집집마다 밥 짓는 냄새를 풍기며 골목에서 놀고 있을 아들딸을 목청껏 부르는 풍경이 이제는 한 시대를 추억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추억 속 이들이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선 소리 내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거나 손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편지를 써야만 했다.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 낮이 밤이 되어가도록 누군가의 집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오빠에게 편지 하나를 전하기 위해 한 달 내내 친구들과 계획을 짜고 오락실에서 편지를 주고 돌아서는 그 길의 설레임을 잊을 수가 없다. 낡은 기억 속 좋아했던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는 건 그때의 귀한 마음을 어렵게 전해서가 아닐까.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기억을 가졌다는 게 때로 뿌듯할 정도로 따뜻한 풍경들이다. 정성스럽고 힘들게 전해야 했던 그 어려운 말들은 이제 모두 레트로 낭만이 되었다.


이른바 '카카오톡 시대'가 밝고 새 시대의 주역인 90년생이 서른이 되는 동안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우리의 낭만은 혼술로 대체되었고 그 시절 낭만은 “라떼는 말이야”라는 뉴트로 개그로 승화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좋은 카메라를 가지지 않아도 똑똑한 아이폰과 필터가 그럴듯한 사진들로 탈바꿈시켜주는 시대, 참 쉽고 예쁜 세상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삭제가 대수롭지 않고 사진을 다시 찍는 건 별 일도 아니다. 타인에 대한 대한 이야기는 TMI(Too Much Information)로 분류되고, 이미 뱉은 말도 손만 재빠르면 삭제할 수 있다. 뱉은 말까지 주워 담을 수 있는 세상이라니 말 한마디가 얼마나 쉬워진 걸까. 이 편리하고 좋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지겹고 무료할 때가 많다. 내가 발품을 팔아 발견한 감동적인 맛을 가진 밥집도 인스타그램을 여는 순간 나만의 감동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시해진다. 오죽하면 혼자 먹으면 맛도 없던 술이 혼자 마실 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세상일까. 너무 많은 말들이 가벼이 오고 가는 세상이어서 사람들은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말들을 피해 기꺼이 혼자 있기를 선택한다. 나는 어쩐지 이렇게 쉽고 예쁜 세상이 짠하다. 가벼워진 말들 때문에 상처를 입는 사람이 속출하고 말을 전하기가 쉬워 퇴근 후 업무 카톡 금지를 법으로 규제해야 하다니, 얼굴을 마주 봐야만 욕이라도 전할 수 있었던 시대의 말이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이게 느껴져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나도 모르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게 된다. 작년 겨울, 4번도 넘게 봤던 그 드라마를 어김없이 또 보고 있던 나에게 친구는 물었다. “우리는 왜 자꾸 이 드라마만 보면 푹 빠져서 보게 되는 거지? 심지어 볼 때마다 울컥해” 나는 답했다.

따뜻해지잖아

나의 대답에 친구는 완전히 납득이 됐다며 더 이상 말을 잊지 않고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따뜻하고 울컥하는 것들을 찾는 이유는 말이 가볍고 마음이 차가운 세상이라 본능적으로 마음을 데우는 것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에겐 어렵고 따뜻한 말의 기억들이 있으므로.


오늘도 썼다가 지운다. 말하려다 삼킨다. 상처가 되는 말을 하기보단 차라리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쓰는 아도르

사진, 글, 캘리그라피 adore
블로그 : http://jwhj0048.blog.me
인스타그램 : http://www.instagram.com/adore_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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