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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Jan 22. 2024

엄마를 통해 마주한 세상

1-2. 0에 가까워지기

00. 딸의 인생 


언니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쯤이다. 처음으로 가족끼리 호주로 해외여행을 갔다. 가이드를 담당해 주셨던 젊은 청년과 식사를 하던 중 와이프가 막달이어서 곧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해 이것저것 관심 어린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러던 중 예쁜 공주님이라는 말에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묘한 표정으로 변하였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하는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요. 첫째를 낳고 딸이라는 소리에 펑펑 울었어요"

젊은 청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우리 엄마에게 이유를 물었고 우리 또한 엄마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억울했던 적이 많거든. 혹여나 우리 딸이 그런 인생을 살까 봐.. 그래도 지금은 사회가 많이 좋아져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엄마는 예비 딸을 둔 한 아이의 아빠에게 못할 말이라는 걸 느꼈는지 얼버무리며 대화를 성급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난 오랫동안 이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로부터 몇 년 후, 난 엄마와 갈등일 빗던 상황에서 이렇게 외쳤었다.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때 엄마의 표정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 된 것 마냥. 그러면서도 엄마는 나에게 대꾸를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무어라 대변해야 할지 몰랐으리라. 


01. 엄마의 인생


우리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접어두고 한 동안 '엄마'에 관해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난 상담이 몇 회차가 더 진행되기 전까지, 몸이 서서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 조만간은 해야 하며 빠르게 직면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회복되는 길임을 알았기에 매일 1시간씩 산책을 하며 마음의 근육일 키웠다. 

"전 엄마를 증오해요. 어쩌면요 아직도"

상담사는 그 증오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기를 원했다. 태초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마음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을 더듬듯 조각나 있으나 선명한 아픔들을 하나씩 두서없이 꺼냈다. 

"전 증오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어요. 그게 신이든, 인간이든, 세상이든.  이런 말은 부끄럽지만 가장 명확하고 가까우며 실현 가능한 대상이 엄마였던 거 같아요"

잘려나간 기억 속에 엄마는 늘 죄인 된 표정으로 내 곁에 있었다. 나를 낳았다는 이유로, 변하지 않는 자식의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신께 용서를 빌듯 자식에게 헌신하고 희생하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보는 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가 더욱 벌을 받기 바라는 마음과 나로 인해 죄사슬에 묶인 한 여자의 인생을 보며 뭐 하나 마음 편한 게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가도 나보다 행복하면 억울할 것 같은 마음에 난 오랫동안 엄마를 향해 어긋난 사랑을 키워왔다.


02. 여자의 인생


엄마는 50년이 넘어서야 무너졌다. 매일 같이 울었고 쓰러졌으며 널브러졌다. 그리고 나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인생을 돌려달라고 말했다.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나에게 퍼부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후회했다. 엄마는 50이 다 돼서야 그제야 나는 누구일지를 묻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관심 없는 한 여자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난 다짐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남을 위한 희생 따윈 하지 않겠다고. 모든 걸 다 주고 자신을 잃어버리는 삶의 결과를 보면서 엄마를 향한 미안함보다 외면을 택했다.

난 잔인하게도 엄마에 시간을 갉아먹은 것에 대한 반성도 죄책감도 없었다. 난 여전히 신도 아닌 세상도 아닌 엄마라는 사람에게 죄 값을 물었다. 그래서 엄마가 아닌 인생을 살고 싶었다. 살아야만 했다. 아빠 없이는 살지 못하는 엄마를 보면서, 자식들이 전부였던 엄마를 보면서. 나는 나로서 완전하고 완벽하기 위해 살았다. 여자의 인생은 그래야만 차별과 무시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03. 나라는 인생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하는 것만이 옳은 길이라 생각했던 나는 엄마와 정반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가족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고. 타인보다 나의 이익을 챙기며, 여자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삶을 바라봤다. 사랑받지 못했던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서 사랑받기 위해선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성공해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렇게 스스로가 완벽한 삶을 사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에게 '일'이 전부인 인생을 만들어줬다. '일'만이 내가 원하는 완벽한 여자의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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