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지금은 체크인이 안 되고, 오후 3시 이후에 가능해요. 그동안 짐은 맡아 줄게요.”
호스텔 로비에 앉은 직원은 혹시 이른 체크인이 가능하냐는 나의 물음에 친절히 답해줬다. 그러면서 캐리어에서 뺄 게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잠시 화장품만 좀 빼겠다고 답한 뒤 이내 캐리어를 건네줬다. 캐리어 하나만 내 손을 떠나도 영혼이 300그램 정도는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로비 한편에 앉아 화장을 하던 중에 다른 한국인이 한 명이 들어와 홀로 체크인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역시 나와 같이 짐만 맡기고 돌아섰는데 나는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고 얼른 그를 향해 친절하고 무해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이세요?”
“어, 네. 혼자 여행 오셨어요?”
보통 해외에서는 이 두 문장이면 신원 확인이 끝난다. 거기에 서로를 향한 호의적인 미소까지 더해진다면 더더욱. 한국인이고, 혼자고, 마침 식사 시간이라면 이대로 같이 밥을 먹으러 가겠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보면 된다. 그는 그 길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화장을 마무리하는 동안 근처 맛집을 찾겠다고 말했고, 수 분내로 일어난 우리는 자연스럽게 숙소 근처에 있는 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가 찾은 맛집은 포르토 상 벤투 역 근처에 위치한, 멋진 테라스를 갖춘 작은 식당이었다. 시계가 2시를 향해가고 있었음에 불구하고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들어와 실내의 자리가 모두 차기 시작했다. 원래 오후 3시면 브레이크 타임을 할 정도로 손님이 없는 애매한 시간이 아닌가? 특히 이 지역은 낮잠 문화인 시에스타로 유명하지 않나? 우리는 서로 의아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거였지만 이곳은 ‘타파스’라고 해서 식사에 와인 등 술을 곁들여 먹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당은 오후 3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고 그 이전에는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다고. 새벽 6시 반부터 문을 열어서 오후 3시면 문을 닫았던 호주에서의 생활과는 정반대인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가끔은 아주 작은 습관이 문화가 되고 그 문화가 다른 지역과 국가와 대비되는 생활상을 낳는다는 걸 다시금 경험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세계는 달라져 왔겠구나.
나와 함께 식사를 한 한국 여성분의 이름은 나라였다. 여행할 수밖에 없는 이름인가, 싶었는데 그는 아직 대학교 2학년으로 독일에서의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틈이 날 때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여행하는 동안 이렇게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파도 타듯 넘나드는 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그 생활을 향한 부러움을 숨기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부러워하고 동시에 격려했다. 더 많이 다니라고,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라고. 직접 경험한 것만이 남는 것이라고.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건 오로지 그런 것들 뿐이라고 말이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질투의 감정을 삭이는 건 오직 나의 몫이었지만, 그분들에게는 더 밝은 미래와 즐거운 날들만 기도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건, 하지 않건, 나는 내 여행길 위에서 만난 모두를 축복하고 줄곧 이렇게 내 여행기 속에 집어넣어 그들을 응원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의도적으로 첫 휴학을 했다.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것들이 그 당시에는 많았다. 그다음 한 학기를 쉬며 미래를 계획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고민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도 벌었다. 주말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주중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굳이 야간 아르바이트를 선택한 이유는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면서도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다음 해 1월 토플 시험을 치고 바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유럽 여행 중에 내가 기대 이상의 토플 성적을 거뒀음을 알게 됐다. 호스텔 식당에서 친구 몰래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확인하던 순간과 확인한 직후에 방방 뛰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3학년 1학기를 다니며 교환학생에 지원했고 1 지망했던 학교에 합격했다. 해당 학교로 수강신청도 마치고 출국 준비도 꾸준히 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꿈꿨었던 교환학생이 되어 캐나다로 떠난다는 사실에 들떠 출국을 2주일 정도 앞두고 친구와 국내 여행을 떠났다. 통영 일대를 돌아보고 그곳 게스트 하우스에서 여러 친구들을 사귀며 떠들썩하게 놀고 있던 날 밤. 주체되지 않은 흥겨운 분위기를 깨고 엄마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아직도 그날 밤 전화를 받기 위해 나갔던 바깥의 서늘했던 공기와 애처롭게 걸려 있던 달의 형상을 잊지 못한다.
“정말 이런 말 꺼내기가 엄마도 너무 어려운데.”
사실 이런 말들은 그 내용이 아니라 분위기가 이미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나는 다가올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고요히 서 있었다. 그리고 들었다. 이번엔 얼마나 끔찍한 파도일까. 상투적인 말로 시작된 엄마의 첫 문장은 쉽게 끊이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아는 사람을 믿고 투자한 돈을 모두 날렸고, 당장에 생활한 돈이 없는데 혹시 모아 놓은 돈이 있으면 좀 빌려 달라는 말이었다.
애석하게도 이런 얘기를 들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대학생 되고 나서는 몇 번, 모아 놓은 돈이 있으면 얼마만 좀 빌려줄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었다. 그렇다 해도 사기를 당했다는 얘기가 익숙한 건 아니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만 해도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건 우리 집의 흔한 풍경이고 연례행사 같은 것이기도 했다. 다만, 이제와서는 우리네 인생에서 그런 불분명한 시기는 끝났고 어느 정도 안정된 궤도에 들었다고 생각했던 터라 ‘사기’라는 단어를 십 수년만에 다시 듣게 되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몸이 휘청하고 무너지려는 걸 다잡고, 빠져나가는 힘을 애써 붙들었었다.
엄마는 그 길로 충격을 못 이겨 병원에 입원했고, 엄마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교환학생에 가서 써야 할 돈을 모조리 엄마에게 빌려주고 학교에 전화를 걸어 혹시 교환학생을 취소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가끔은 인생이 너무 잔인해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 길로 다시 휴학을 신청했다. 또다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주중에 2개, 주말에 1개 세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조금씩 치유받았었다.
그러니 내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인생의 잔인함이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떤 아픔들은 결코 낫지 않기도 하며, 어떤 상처들은 결코 지워지지 않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얼굴로 마주치는 내 안의 슬픔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옅어지지 않으니까. 그런 걸 굳이 인생에, 누구의 몸 한 귀퉁이에도 새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패는 인간을 강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한 인간이라고 해서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클레라구스 성당의 종탑에 올랐다. 멀리까지 펼쳐지는 포르토 시내의 전경을 내려다봤다. 동화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는 온갖 건물의 지붕들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의 흐름이 맞물려 현실을 비현실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어려서 보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이 갑자기 튀어 올라 소피와 함께 하늘 위를 걸어 다녀도, 날씨가 참 좋지? 하늘 위를 걷기 좋은 날씨야, 하고 말 것 같은 풍경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더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내가 알고 있던 끔찍하고 혼란스러웠던 세상은 이 세상이 가진 많은 면모들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더 오래 살아서, 더 많은 세상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남은 인생을 좋은 기억들로, 또 좋은 사람들로 채워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살게 하는 건 언제나 이런 것들이었다. 강 위를 처연하게 걷는 사람, 대학교 캠퍼스를 자유롭게 걷는 학생, 멀리도 뛰어나가는 어린이, 그들이 가진 가지각색의 사연들. 힘들었지만, 이겨냈고, 세상은 충분히 살만 한 곳이라는 결론.